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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8일 2020년 화요일 묵상

본문: 창세기 41장 37~ 57절


1. 창세기 41장에 기록된 ‘요셉의 꿈 해몽’과 그 결과로 인해 ‘총리’가 된 사건은 ‘인생역전’의 전형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사건 자체에 무게를 두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그 분의 십자가 복음’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바로의 꿈,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잘못 이해, 적용하면 ‘무속인’들의 ‘꿈해몽의 한계’에서 헤매게 됩니다. ‘인간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를 ‘총리 되게 함’으로 생각하면 ‘고진감래, 대기만성’ 등으로 결론지어지는 ‘세속적 성공’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 ‘하나님의 영,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꿈을 해몽하여 총리가 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총리되고 난 이후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짜 일하심’은 ‘애굽 총리됨’ 이후에, 요셉이 죽은 뒤 약 400년이 지난 다음에 시작될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을 시작으로 더욱 선명해진 ‘대속의 은혜를 통한 죄인의 구원, 살리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에서 십자가 언약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요셉 아니라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 역시 ‘대속의 은혜’가 필요한 ‘인간,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의 꿈을 해몽하였습니다. 그렇게 ‘애굽의 총리, 2인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귀한 인도하심, 놀라운 역사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가운데 두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38~39절에 바로가 요셉을 향하여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둘째, 45절의 ‘요셉의 결혼’입니다.

38, 39절에서 바로는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일까요? ‘대속의 은혜를 통해 죄인에게 한없는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일까요? 아닙니다.

바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엘로힘(전능자)’입니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신적 존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 신적 존재는 정말 다양합니다. 애굽은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적 배경의 사회였습니다.

특히, 다양한 신을 섬기는 ‘다신종교(오늘날 종교다원주의)’는 타민족인 ‘히브리인’이 믿는 ‘신적 존재’도 ‘이런저런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아무 상관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더욱이 바로의 찝찝한 꿈을 해몽해주고, 해결책까지 제시해준다면 그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흔히 나타납니다. 그 심령 깊은 곳에 들어가보면 소위 ‘종교 갈아타기’한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던 것 자체가 범죄인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범죄라고 말을 하니, 인정하긴 싫어도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신’에게 축복을 받으려면 인정하는 시늉 또는 일회성 인정에 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뒤 죄인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끝까지 십자가 붙들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경우인지 다시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요셉의 결혼’을 있는 그대로 살펴봐야 합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애굽식 이름입니다. 말 그대로 ‘창씨개명’입니다. 게다가, 요셉의 아내, ‘아스낫’은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이라고 기록합니다. ‘온’은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름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면 말 그대로 ‘애굽 종교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냥, 요셉은 무조건 다 용서가 되는 건가요? 설마, ‘우리 요셉, 하고싶은 것 다 해’인가요?

3.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요셉이 총리직을 거절했다면, 적어도 ‘아스낫’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이라는 푸념같은 질문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물론, 요셉이 총리된 것, 아스낫과의 결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라도 총리직에 대한 거절, 아스낫과의 결혼을 통한 절대신분상승을 거부할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요셉’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총리 된 요셉, 요셉을 총리로 만드신 하나님’도 귀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창세기 50장 22~26절’입니다. 창세기의 끝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는 요셉으로 바꾸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 신앙의 인물로 높임을 받는 모든 이들은 ‘사람의 연약함과 죄성으로 인한 그릇된 선택과 결정을 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침내 선한 십자가의 길, 천국 소망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함, 그 변치 않는 사랑’에 붙들리어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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