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9장 1~23절
1. 오늘 본문, 창세기 39장은 ‘요셉 스토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일 것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뿌리친 사건은 ‘기독교 윤리’의 귀한 모범입니다.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요셉처럼 성실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은 본받아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온갖 권모술수,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세상에 ‘요셉’의 이야기는 귀감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철학과 자세로 인생을 산 사람이 ‘요셉’ 한 사람뿐일까요? 다시 말하면, 다른 종교인 혹은 철학가, 사상가 등에는 없을까요? 분명 있습니다.
심지어 8절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는 ‘요셉’의 고백에서 “하나님께” 대신에 ‘다른 종교의 신, 가문의 어른, 철학 사상 등’을 집어넣어서 얼마든지 ‘자기 도덕 신념’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요셉의 행동’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행한 ‘귀한 결단과 행동’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 윤리와 차원이 다른 ‘십자가 복음’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자는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 요셉에게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2. 흔히, 요셉의 일생을 ‘인생 역전’의 연속이라고 말합니다. 37장에서는 ‘귀한 아들’이 ‘팔려간 아들’이 됩니다.
38장에서는 팔려가도 ‘애굽, 초고위층 보디발’의 집에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형통하게 하심을 입어 ‘가정 총무’가 됩니다. (1~7절)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7~20절의 기록처럼, 유혹과 시련이 닥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여,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드라마틱한 반전은 아직 멀었습니다. ‘감옥의 간수장’이 ‘제반 사무(감옥의 업무)’를 요셉에게 맡깁니다. (앞으로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일들은 계속 됩니다.)
요셉의 극적인 삶,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요셉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신통방통한 능력 혹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에 머무르지 맙시다. 그런 신적 보호하심을 입을 만한 자격을 갖춘 요셉, 그런 결단을 한 ‘신앙의 영웅, 요셉을 닮자’에서 멈추지 맙시다.
저는 오늘 본문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9절의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요셉의 이 말을 ‘도덕, 윤리 기준’의 ‘충성심, 신실함’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신실하고, 정직하고, 충성된 요셉의 성품 때문에 8~9절의 고백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주인에게 충성스럽고, 하나님 앞에 한점 부끄럼 없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이 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성적 유혹, 사사로운 이익 따위에 눈꼽만큼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 아닙니다.
젊은 청년(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지낸 시기를 18~30세정도로 봅니다.)이었던 그에게 ‘성적인 유혹’은 견디기 힘든 것임을 자신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그가 이 유혹을 견딘 것입니까? 그것은 감사입니다. 지금 내게 허락된 것에 대한 깊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위탁 받은 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선 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절)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내게 허락된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에 대한 깊은 감사가 없으면, 반드시 선을 넘게 됩니다.
특히, 많은 것이 허락될 수록 ‘위탁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물어야 합니다. 많은 것, 큰 것, 힘있는 것을 위탁 받을 수록 더 십자가 앞에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결정적일 때,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고 ‘선을 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받은 것이 별로 없다고 덜 물어도, 안 물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허락된 것에 대한 감사’가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3장의 ‘선악과’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위탁하셨습니다. 단, 선악과만 제외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 선을 아담이 넘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락된 듯한 그때, 인간의 본성 속에서는 ‘남은 하나’까지 다 이루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바로 이 때, 십자가에 그 마음을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 저는 여전히 본성대로 행하려는 자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애매한 경계선에서 위험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모든 것이 응답됐다.”라고 말하는 종교인들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내 삶과 인생이 ‘십자가 은혜로 인도함 받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작은 방법이 있습니다. “내 본성 반대로 이루어진 것에 나도 모르게 깊은 감사가 흘러나올 때! 기쁨이 솟아오를 때! 십자가 은혜로 인도함 받았다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 받았다고 감히, 겨우, 떨림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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