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8장 1~30절
1. 오늘 본문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와 다말 사건’은 ‘요셉 이야기’라는 전체 흐름 속에서 볼 때, 갑자기 끼어든 낯선 내용입니다.
물론, ‘창세기 38장’이 있기에 ‘구속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각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혈통, 족보’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빚어지는 종교적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있는 그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 ‘21세기의 잣대’가 아니라, 수천년 전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 문화, 사고 등’을 고려하여 읽어야 합니다. 물론, 과거의 관습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그랬건, 모두가 그러니 그랬건, 잘못은 잘못입니다.
2.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형사취수제도(신25:5~10)입니다. 형이 자녀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형의 대를 잇게 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구약성경 외에도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 속에 있었던 결혼제도였습니다.
1~5절은 유다가 ‘가나안 여자(수아의 딸)’와 결혼한 것과 그녀를 통해 세 아들(엘, 오난, 셀라)을 낳은 기록입니다. 유다는 이미 아브라함 가문에서 금지된 결혼 대상인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야곱의 통제권을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6~11절은 유다가 며느리로 ‘다말’을 얻은 것과 ‘엘’과 ‘오난’의 죽음, ‘셀라’가 죽을까 두려워하여 ‘다말’을 처가로 돌려보낸 기록입니다. ‘엘’이 어떤 악행 때문에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만, 다말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간통을 저지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난’은 ‘형사취수제도’를 거부했습니다. 형수와의 성적인 관계는 가지지만, 형의 후대를 잇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9절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냥, 처음부터 싫다는 의사를 표했어야 합니다.)
12~23절은 뭐라 말하기 참 민망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후대’를 이으려고,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유혹합니다. 사실, 성경은 ‘시아버지와의 성적관계’를 엄히 다스리라 말씀(레18:15)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고대 근동에는 ‘시아버지를 통해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으로 ‘시아버지를 통한 후대 잇기’가 금지된 것은 ‘모세 오경(레:18:15)’이 기록된 이후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레위기 기록 이전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다말’의 중심입니다. 성적 즐거움 혹은 경제적 수입 (일명:화대)을 위해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유다)’를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남편의 자녀를 낳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이 잘 증명되는 것이 18~19절입니다. 염소를 주겠다는 것에 대한 ‘담보물’로 ‘도장, 끈, 지팡이’ 즉, 당시 남성들의 신분증과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 수절을 의미합니다.
24절 이하에서 다말의 임신 사실이 유다에게 알려졌으나, 다말이 보여준 ‘도장, 끈, 지팡이’ 때문에 ‘유다’는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과 다말의 옳은 행동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유다 역시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23절)
3.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 혹은 ‘유다 지파’를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말의 행동’ 역시 지나친 ‘구속사적 해석’을 가미하면 곤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해 와야 하는데 유다가 그것을 막으니, 창녀로 변장을 해서라도 유다의 대를 이어준 것이다.”라는 식의 과한 해석은 참 위험합니다.
다말은 그냥, 그 시대의 법을 따른 것 뿐입니다. 가나안 풍속대로, 자기가 듣고 배운 대로 행한 것뿐입니다. 칭찬받을 일도 아닙니다. 오늘날 기준에 맞춰 비난 받을 일도 아닙니다. 그냥 형사취수제도에 충실했고, ‘과부의 옷’을 다시 입음으로 과한 비난을 피한 것뿐입니다.
유다 역시 자기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딱 거기서 멈춥니다.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저는 ‘유다와 다말’ 사건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났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다말의 화형’을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그렇게 ‘도장, 끈, 지팡이’도 함께 불태워버렸다면, 자신의 부끄러움(23절)을 숨기기 위해 모든 증거를 다말과 함께 불태움으로 증거를 인멸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베레스’와 ‘세라’는 다말과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네, 진짜로 ‘유다 지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이 불가능(이렇게 말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전을 품은 다말의 변칙적? 임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유다의 인정, 멈춤, 회개, 돌이킴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짜 십자가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십시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뚜벅 뚜벅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엎드릴 때 ‘생명의 길, 회복의 길, 소망의 길’이 활짝 열리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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