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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30일 2020년 수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18절

1.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한 변론이 계속됩니다. 이 변론은 ‘구차한 변명’이 아닙니다. 복음과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오해를 해소시키기 위한 설명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사회에는 다양한 종교인, 철학인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종교와 사상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렇게 사회적 지위, 물질적 혜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로마제국 각처에 있었던 ‘유대교회당’에서 강론 되는 ‘구약성경’과 ‘유대교’는 새로운, 신선한, 나름 흥미 있는 ‘종교, 철학, 사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문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흘러나옵니다. ‘예수’라고 불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3일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유대교’ 혹은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종교인들이 앞다투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한 생각, 논평, 주장 등을 떠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바로, ‘거짓교사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주 활동무대는 ‘유대인의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었더라도, ‘거짓교사들’이 전하는 말에 다시 기울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긴 분량을 할애해서라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가 된 것에 대해 속이라도 꺼내 보여주고 싶은 간절함으로 변론을 펼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전체적 흐름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영이 나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것! 내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3~15절)

무엇보다 이 고백을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 자세는 겸허함 그 자체입니다. ‘사도적 권위’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7절에 그것이 너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질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한 나같은 존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빛’이 있음에 감사, 감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진정으로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자신이 ‘질그릇’이라고 전인격으로 인정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인정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어떻게 상대방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습니까? 겉으로 말하지 않을 뿐, 생각으로 얼마나 다른 사람을 얕잡아봅니까?


3. 참, 자주 말씀 드립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닌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자기 의로움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향해 고개가 끄덕여질 때 빨리 엎드려 십자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 자아가 자라 올라옴을 인정하고 십자가로 그 생각을 도려내야 합니다.

16절의 ‘겉사람’을 ‘사람의 육체, 정신’으로 생각하고, ‘속사람’을 ‘영혼’ 정도로 이해하면 ‘십자가 복음’을 헷갈릴 수 있습니다.

‘겉사람’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포함한 전인격입니다. 그러면 ‘속사람’은 무엇일까요? 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영혼’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 그대로, 날 것 그대로 봐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내 속에 영혼이 개선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낡아지나”라는 것을 자칫 ‘현재진행형’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낡아지나”로 번역된 헬라어 ‘diaphtheiro’는 ‘파괴되다’라는 뜻이며, ‘3인칭 직설법 현재 수동형’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임할 때, 이미 ‘겉사람’은 파괴됐습니다. 그리고 ‘속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6절의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는 창세기 1장 3절 “빛이 있으라”를 인용한 것입니다. 창조의 빛이 임함은 ‘혼돈과 어둠’이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 사시는 것의 대전제는 ‘범죄한 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파괴됨’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파괴됨’을 너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는 ‘내가 십자가에서 파괴됨’이 두렵지만, 내 심령 구석구석을 비추시는 ‘성령의 빛’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 따스함과 사랑에 녹아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심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성령의 빛으로 우리를 따스하게 비추시는 그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로 향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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