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7장 18~36절
1. 오늘 본문은 비극입니다. 한 가족의 너무 아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편애, 동생의 철없음, 형들의 질투 등이 뒤섞여 결국 가족사의 비극으로 폭발한 사건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는 과정은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지나친 알레고리(풍유)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는 것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요셉의 꿈을 과대 해석하여 ‘요셉을 애굽 총리로 삼으셔서, 창대한 민족을 만들고, 출애굽 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덮어놓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요셉 우상화’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되건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식의 ‘낙관적 운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형들의 질투’가 아니더라도 ‘요셉은 애굽’에 갈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다른 방법으로 ‘애굽’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죄성에 의해 저지른 일을 선하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들을 붙잡으셔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한 결과’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2. 18~20절에 기록된 형들의 심리 상태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그릇된 사랑, 집착에 가까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요셉, 소외된 형들의 질투 등이 뒤섞여 얼마나 무서운 일을 꾸미게 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쌓이고 쌓인 것이 ‘꿈’이라는 불꽃으로 인하여 폭발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요셉의 꿈’에 대한 거품을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21~22절은 그나마, 장남 르우벤이 요셉을 구하려 한 장면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장남으로서 가족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 의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한 후 아버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요셉은 일단 살해당하는 것은 면합니다. 대신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마른 우물)에 갇히게 됩니다. (23~24절)
여기서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23~24절의 ‘채색옷’ 벗겨진 것, 28절 ‘은 이십’에 팔린 것, 31절의 ‘옷에 염소피를 적신 것’ 등을 풍유적으로 예수님에게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우주의 왕의 권세(옷)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 십자가에서 벗겨지신 것, 은 30세겔에 팔린 것 등을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그렇게 팔려가 고생하다가 ‘총리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연결합니다.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데리고 온 것, 기근에 먹여 살린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과 연결합니다.
특히 26~28절의 ‘유다’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셔야 하기 때문에 아주 잘한 것으로 말합니다. 유다가 아니었으면 요셉은 그냥 죽임을 당했고, 애굽에 팔려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요셉의 행위를 두둔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본다면, 유다는 죽이는 것보다 ‘은 이십’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속에는 정말 복잡한 인간 본성이 숨어 있습니다.)
제발 이런 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수습’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인간은 죄성으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망쳐 놓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것을 수습하시고, 새롭게 하셔서 ‘여호와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라고 생각해야 정상입니다.
3. 기독교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하나님의 훈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 편리하죠…)
왜 그럴까요? 회개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세계관 때문입니다. 과정과 원인이야 어떻든, 총리만 되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식의 세계관은 무속, 샤며니즘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종교 도덕, 윤리에도 없습니다.
복음은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길’로 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는데도 뭐 대충 지금의 결과가 ‘사람 보기에 좋은 것, 세상의 복’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것이라고 해서 내 삶이 십자가의 복음에 인도함 받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죄악된 자아의 속성을 깊이 인정하며,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 내 본성 반대로 살아온 삶이 진정한 복음에 인도함 받은 인생입니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33~36절의 ‘아버지 야곱’의 통곡을 듣고 늦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요셉’을 찾아나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오히려 더 빨리 온 가족이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을까요? 물론,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총리가 되는 것도 다른 방법이었을 수 있습니다.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인간의 꼼수와 범죄의 결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회개하고 엎드리며, 청산하고 돌이킵니다. 왜냐면 진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은 십자가에서 시작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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