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하 7장 1~17절
1. 오는 화요일(10/4일)부터 ‘새벽예배’를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 ‘묵상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너그럽게 봐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글을 ‘2년 6개월’ 정도 썼던 지난 시간을 좀 돌아보았습니다. 기억의 회로를 돌려 2020년 3월로 가봅니다. 중국에서 ‘COVID-19’가 시작됐을 때, 남의 일 같았습니다. 참 어리석었습니다. 결국 온 세상을 뒤덮은 비극적인 이 상황으로 인해 모두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시간을 겪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고, 모든 것이 ‘온라인 세상’으로 바뀔 것 같았지만, 결국 우리는 다시 모였습니다. 서로의 눈과 눈을 마주하며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와 기술을 거친 영상과 음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과 육체, 그 전인격이 스며 나오는 우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회복된 성도의 모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상을 틀고 한 구석에서 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교회 공동체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 이 땅의 모든 주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더욱 풍성해질 줄 믿습니다!
2.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눌 말씀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하 7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세우시는 기록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시내산) 언약’, 다윗의 후손을 통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실 ‘십자가 언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 언약’을 ‘다윗’이라는 사람, 혹은 ‘유다 지파’라는 특정 이스라엘 지파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성육신’입니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범죄한 인간에 대한 속죄’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기특한(?) 생각을 한 다윗에게 주는 보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 가문의 왕권 보장으로 이해하면 참 답답한 것입니다.
3.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훤히 보고 계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네, 우리가 머리로는 너무 잘 알고, 입으로는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내 속사람의 상태를 다 보고 계신다.”입니다.
그걸 안다고 말은 하지만, 사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이 일을 행하는 나의 본 마음을 보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늘 그래왔던 것처럼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대로 삽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참 기특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지자 ‘나단’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하지 않은 생각,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점검하지 않고 뱉은 말, 행하려는 그 일에 대하여 일깨워 주십니다.
4.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7~18절의 하나님 말씀 중에 어떤 부분을 꼭 붙들어야 할까요?
저는 변함없이 늘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이상하리만큼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바로 5~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착각하면 안 된다. 난 네 속을 훤히 보고 있다.”입니다.
제가 다윗이었다면, 7절이 끝나는 순간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하시는 말씀은 떨려서 뭘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영혼에 새긴 것은 “성전 건축은 허락된 것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성전은 지어도 되고, 안 지어도 되는 것이구나.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성막이구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6절을 통해 ‘장막과 성막’을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하나님은 허름한(?) 천막을 좋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성막(Tabernacle)’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원한 동행과 동거’입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 그 죄로 막혀 버린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40년 광야 생활, 그들이 진을 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정 중앙에 성막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건축물을 짓는 종교 업적이 다윗이라는 한 사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교적 자부심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혼에 새깁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가 영원히 거할 집이 되신 예수님(7절)을 묵상합니다.
참 성전이 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요한복음 1장 14절)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장막’에 영원히 거할 것(요한계시록 21장 3절)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바라봄이 땅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유일한 능력과 힘이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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