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3장 1~18절
1. 오늘 본문인 3장에서부터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새 언약’에 대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살펴본 내용의 핵심 단어가 ‘그리스도의 향기’였다면, 3장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비롯한 사도 바울 서신서들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극초기 초대교회, 즉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초대교회들은 ‘유대인 개종 기독교인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첫째, 바울의 편지를 이해하는 데 유대교적 배경이 필요합니다. 둘째,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적 선입견을 깨뜨려야 하기에 설명이 다소 길거나 이해가 힘듭니다. 셋째, 이런 배경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완성’을 ‘편지’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돌판(십계명 돌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2~3절).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새 언약’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각 사람의 심령에 친히 기록하신 ‘새 언약’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마음판’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중요성입니다. ‘돌판’에 쓴 것,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절대 ‘구약성경 및 율법규례’를 폄하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6절에 집착하여 ‘율법 조문’을 나쁜? 것으로 지키지 않아도 될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유대교를 신봉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기 의로움’으로 삼은 것을 깨뜨리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여전히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적당히 섞어서 자기 ‘의로움, 도덕심’ 등을 드러내기 위한 그들의 본심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2~18절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영광을 설명합니다. 7절과 연결하면 더 이해가 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가 이스라엘 진영에 내려오자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 스며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수건’을 덮어쓸 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 조문’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제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한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오셨습니까?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수건을 벗은 얼굴’을 대하듯 범죄한 인간과 전인격을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어렴풋이 알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된 것입니다. 가려졌던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진 것입니다. (14절)
3.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한가지 중요한 영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수건’을 다시 봐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수건’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 ‘수건’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가리는 것입니다. 덮는 것입니다. 숨기는 것입니다.
‘수건’으로 번역된 헬라어 ‘kaluma’는 ‘veil, covering’입니다. 굳이 번역한다면 ‘덮개’가 맞을 것입니다.
네,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 ‘유대교인, 오래 묵은 신앙인들’에게 “율법을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일부를 지키는 너희의 의로움을 버려라. 그 종교심, 도덕심으로 ‘범죄한 자아, 썩어 냄새나는 자신’을 가리지 말아라. ‘율법 속에 담긴 대속의 은혜’를 그만 종교화, 윤리화 시켜라. ‘수건, 덮개, 껍데기’ 다 벗고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 그렇게 진정한 생명을 누리자. 예수께 돌아와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본성을 가리고 있는 수건보다 더 두꺼운 그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하면, 십자가 은혜로 걷어내지 못하면 ‘자유’는 없습니다.
가리기 위해 덮어쓰려는 각양 각색의 ‘수건’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수건’으로 덮으면 자유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악순환만 거듭하게 됩니다.
‘영혼의 목욕탕’인 십자가 앞에 나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벗어본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영적 자유’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나의 포장, 껍데기를 벗어 놓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십자가에 흐르는 피로 나를 씻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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