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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25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창세기 50장 15~26절


1. 이제 창세기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개의 에피소드는 ‘야곱의 죽음’ 후 ‘요셉과 형제들’의 완전한 화해? 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죽음과 장례’입니다.

지난 한 달간 살펴본 창세기 37장 이후의 이야기는 ‘요셉’의 인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창세기의 마지막을 요셉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좁은 시각입니다. 요셉을 영웅화(?)하기 쉬운 관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요셉 스토리’는 적어도 ‘야곱의 일생’ 속에 봐야 합니다. ‘야곱의 온 가족 이야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넓게는 창세기 전체, 모세5경 및 여호수아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되야 합니다.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 관점없이 ‘요셉’을 바라보면 넘쳐나는 오해와 착각 속에 함몰되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누가 뭐라고 해도 19~21절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의 용서와 위로’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의 관대함, 너그러움’에 초점을 맞추면 ‘윤리, 도덕 수준’의 해석에 그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이 변한 것이지만, ‘윤리’와 ‘십자가 복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혼동하게 됩니다. 또다시 ‘요셉 추켜세우기’로 흐르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뒤 형들에게 다시 두려움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의 앙갚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런 것을 악용하여 ‘요셉’이 ‘형제들’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괴롭히거나 두려움을 주는 것도 안 됩니다. (글로 이런 복잡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아무튼, 두려워하는 형제들에 대해 ‘요셉의 용서와 위로’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본받아 마땅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하지만, 놓치지 말하야 할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17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입니다. 두번째는 19절의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입니다.

먼저, 17절의 “우리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유다 외에 다른 형제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토해낸 기록이 없습니다.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저 ‘유다의 돌이킴’에 슬쩍 얹혀 갔다고 나 할까요… 명확한 자신들의 죄와 잘못에 대한 고백이 없었습니다.

3. 형들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다릅니다. 처음 형들을 만났을 때 감정에 북받쳐 흘린 눈물(창45:1)과는 다른 것입니다.

감정도 작용했겠지만, 성령의 역사 속에서 흘린 눈물입니다. 죄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형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요셉’사이를 성령께서 간섭하고 계시는 증거의 ‘눈물’입니다.

사실, ‘눈물’이 참 교묘한 것입니다. 눈물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스스로 눈물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눈물이 진심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눈물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흘리는 눈물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 없는 눈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눈물 이후의 행동이 눈물의 진정성을 증명해 줍니다.

눈물을 흘린 뒤 요셉의 말과 행동을 보십시오. 19~21절의 고백은 ‘진심 어린 눈물’의 증거입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를 굳이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습니까?”입니다. 즉 이 말 속에는 ‘나도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때, 나도 잘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4. 회개는 이런 것입니다. 각 자가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잘못을 한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담대함’ 입니다.

소위 믿음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어떤 일을 밀어 부치는 것이 ‘영적 용기, 담대함’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영적 담대함’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이뤄 놓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읽을 각오,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진정한 ‘야곱의 가족들,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출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참회와 용서가 없었다면, 그렇게 요셉이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면 ‘새로운 시작’ 즉, ‘출애굽기’로의 새로운 여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유언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25절)라는 마지막 당부마저 요셉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것이 됐을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사람 생각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적 진통제가 아닙니다. 정확한 ‘영적 수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아버지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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