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9장 29~50:14절
1. 열 두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마친 야곱은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자신을 약속의 땅(가나안)에 묻어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미 요셉에게 두 차례(창 47, 48장) 부탁을 했지만, 마지막으로 더 간곡히, 상세히 부탁합니다.
심심치 않게 ‘야곱의 장례’와 관련된 오늘 본문을 자신에게 비추어 육신의 삶을 마감한 뒤 ‘고향, 고국’에 꼭 묻히길 바라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성경 적용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슷한 사건과 상황, 인물의 스토리가 기록된 성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무속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약속된 천국’을 향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라봐야 할 ‘영적 시선’을 붙들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야곱이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도록 한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십자가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2. 본문 49장29~32절에서 야곱은 자신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에 대해 설명합니다. ‘굴’이 있는 ‘막벨라의 밭’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구입한 것입니다. (창 23장) ‘막벨라 굴’에 대해서는 야곱의 아들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자란 곳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많이 들었던 곳입니다.
여기서 좀 주목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야곱’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좀 좁혀보면, ‘야곱’하면 따라오는 아내가 있습니다. 네, ‘라헬’입니다.
그런데, ‘막벨라 굴’에 누가 묻혀 있다고 말합니까? ‘레아’입니다. ‘라헬’에게 그렇게 집착하던 야곱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첫째 부인인 ‘레아’의 본처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로 ‘라헬’ 대신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도 ‘야곱이 평생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입니다. 라반을 핑계로 ‘레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라헬’이 낳은 ‘요셉, 베냐민’을 편애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좀 다른 주제일 수 있지만, ‘야곱의 12아들=이스라엘 12지파’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구속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모래알 같이 자손이 많아져야 한다는 핑계로 4명의 아내를 둔 것과 12명의 아들이 편애와 갈등 속에서 자란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그 도가 지나쳐서 이런 것을 ‘부정적인 개인의 가정사’에 억지 적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아들 12명이 없어도 큰 민족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또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를 위해서 아들이 필요했다면, ‘유다, 레위’ 포함한 ‘레아’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속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아니냐? 12는 완전수 아니냐?” 네, 맞습니다. 그러나, 숙명의 굴레를 좀 벗어보십시오. ‘그렇게 되기 위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적 사고를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야곱이 저지른 모든 아픔과 슬픔’마저 ‘회복, 치유, 기쁨, 승리’로 바꾸신 것입니다.
야곱의 ‘라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결과, ‘라헬’과 ‘레아’의 질투로 태어난 아들들까지 모두 ‘이스라엘 민족(12지파)’로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야곱의 편애, 형제 간 질투의 결과로 인해 ‘요셉이 팔려간 비극적 사건’마저도 ‘구원의 역사’ 속에 포함시켜 주신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야곱의 장례’는 정말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그 행렬의 장엄함을 통해 애굽에서의 요셉의 위치, 야곱이 받은 대접을 알 수 있습니다. (50장 1~14절)
그러나 이제 저는 그런 ‘영웅담’보다 이 기록을 통해 ‘애굽에서 있었던 야곱과 그 가족의 이야기’가 역사성에 더 초점이 갔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최장 70일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으며, 상류층이 아니면 시체의 방부처리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사실을 모세는 정확히 기록했으며, 그 자신도 ‘애굽 왕실에 입양된 왕자’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숙명과 운명에 오염된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선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놓치게 됩니다. 그저 ‘이 땅의 저주와 지옥의 저주’를 피하는 수준에서 ‘십자가의 구원’을 이해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은 영원한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십자가 안에 있는 구원은 예정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의 구원 역사는 변함없이 흘렀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속아넘어간 사람의 죄성, 욕심, 탐욕, 무지함,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흘러갔습니다.
야곱이라는 개인은 자신의 탐욕으로 4명의 아내를 통해 12명의 아들을 낳고,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험악한 세월’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고 오늘 내 앞에 있는 ‘십자가를 통한 사는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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