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하 3장 17~26절
1. 전령을 보내 ‘다윗’과 1차 협상(?)을 한 ‘아브넬’이 드디어 ‘헤브론’을 직접 방문합니다. 그러나, ‘아브넬’은 암살을 당합니다. 자신의 동생(아사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적어도 30절까지 연결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 17~18절을 보면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갈라지게 만든 주된 원인은 본인의 야망과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지도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방해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랬던 ‘아브넬’이 돌아섰습니다. 자신이 왕으로 세워 맘대로 조종하고 싶었던 ‘이스보셋’의 한마디, 그것도 ‘리스바’와 통간한 것을 지적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스보셋’을 배신했습니다. (6~10절)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감히’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인간 교만을 하나님의 은혜로 굴복시켰다면,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한마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막아섰던 죄인입니다. 이제 돌이키니 다윗 왕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왕으로 받아들입시다.”라고 고백 했어야 합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 ~했더라면…’은 없습니다. 가정(假定, assumption)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했더라면…’은 아쉬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영적인 경각심을 가지고 또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기 욕심과 죄성에 기반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어리석은 판단, 결정을 내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살지 않으면 ‘아브넬’의 길을 갈 수 있는 자가 제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런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렇게 본문의 시선은 ‘요압’과 ‘아브넬’ 사이에 벌어진 일로 옮겨갑니다. 22~30절을 보면 또 다른 사람(요압)의 분노와 복수심이 초래한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가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원인이 정말 동생(아사헬)을 죽인 복수심과 분노 때문일까요? 그것만 있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넬’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 ‘아브넬’에게 호의를 베풀고, 두 사람 사이에 신뢰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결국, 훗날에 군사 지휘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할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할 때 한가지 이유만으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계산, 주판 알을 튕겨봅니다. 계산기를 두드려 봅니다.
하지만, 은혜가 임하면 달라집니다. 엎드려 기도하면 그 일을 결정하는 다양한 이유 중에서 제 본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양파 껍질처럼 다양한 아름다운(?), 그럴 듯한(?) 이유가 벗겨져 나가고 숨겨진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십자가의 은혜, 말씀의 검, 성령의 불로 벗겨지고, 태워지고, 녹아 내려서 인지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립니다. “주님, 이런 저의 본성을 보지 못했다면 큰 일 날 뻔했습니다.”라는 영적 안도감이 듭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잘못했다고 말하게 됩니다. 아니, 이 회개와 돌이킴을 딛고 다시 세우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믿음이 넘쳐 흐르게 됩니다!
3. ‘사무엘하’를 계속 묵상하면서 이런 각오(?)를 했습니다. “목동 다윗을 왕으로 만드신 위대한 하나님에 너무 관심 두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제 속에 있는 왕 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등에 업고 최고가 되려는 착각(?)’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서 다시 한번 언어(말)의 중요성을 발견했습니다. ‘아브넬’의 언어를 보십시오.
여전히 2인칭입니다. “너희가…”입니다. “너희가 원했는데, 이제 내가 허락해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데, 은근 슬쩍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간교함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차이 중에 하나가 언어(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십자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언어가 항상 1인칭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드러냄을 위한 1인칭이 아닙니다. 반성, 돌이킴, 회개, 문제의 원인에 대하여 언어가 항상 1인칭입니다! (물론, 어느 종교에서 구호로 외쳤던 ‘내 탓이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바라는, 이 일을 행하는, 이 말을 하는 나의 본심을 볼 수 있는 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결정과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는 길, 생명의 길로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분주한 일, 답답한 일, 속상한 일 가운데 성령의 비춰 주시는 능력으로 ‘한 번 엎드리고, 한 번 더 기도하고, 한 번 더 나를 살피는 은혜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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