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22일 2021년 수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1년 9월 23일

본문: 출애굽기 19장 1~13절


1. 출애굽기 19장의 장소적 배경은 ‘시내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후 약 ‘한 달 반(15일)’만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6~17장에 기록된 ‘마라의 물,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아말렉과의 전투’를 겪으며 ‘시내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절의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라는 표현으로 죄성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 구원 받을 자격은 커녕 가장 연약하고 못난 그들을 품으신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더 엄격히 말하면, 그 어떤 인간의 시적인 서술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장 숭고하다는 부모의 사랑,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비유하는 것조차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그 어떤 인간 부모도 자아에 기울어진 본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도저히 하나님께 갈수 없는 존재, 그런 나를 십자가의 은혜로 덮어서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5~6절이 다르게 다가오실 겁니다. ‘특별한 선택, 종교적 우월성, 택함 받은 뿌듯함 등’이 밀려오지 않게 됩니다.


2. 그렇게 5절의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하나님의 표현을 보십시오. 이것이 흔히 생각하는 ‘계약조건’으로 보이십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것을 보면서 자꾸만 하나님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키면 축복, 안 지키면 저주’라는 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언약)은 그냥 일방적입니다. 늘 하나님만 지키셨습니다. 인간은 항상, 먼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방적인 하나님과의 약속은 ‘생명’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인데, 그걸 스스로 떠나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 인간을 다시 불러 주시는 음성입니다.

네, 5절에 말 그대로 ‘내 말’입니다! ‘내 음성’입니다! 생명으로 다시 부르는 ‘나, 여호와의 초청’입니다!

단순한 묵상인 것 같지만, ‘생명’과 관련된 것을 계약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수술을 받아야 삽니다. 이 약을 먹어야 삽니다.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이 계약조건으로 들리십니까? 생명과 관련된 선포 “이렇게 해야 살 수 있다.”라는 말은 쌍방 간의 계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진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진리’입니다.


3. 계약조건을 내가 잘 이행함으로 뭔가를 얻겠다는 생각은 노예의 태도입니다. 저급한 기복과 무속에 근본을 둔 종교인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5절의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또한 ‘최고의 신이 뒤를 봐주는 뛰어난 민족’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다시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 잘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을 얻은 것’은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냥 그게 전부입니다. ‘생명 얻음’은 성취, 성공, 계급, 훈장, 지위, 자랑 등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앞에 두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진짜 죽었다 살아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생명’, 그 자체의 가치를 압니다.

4.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죽었던 경험,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매일 죽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십자가 생명’의 가치를 압니다.

‘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해본 사람만이 ‘내가 아닌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다.’라는 ‘십자가 부활, 그 생명’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자세입니다. 6절의 ‘제사장 나라’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요? 정교일치 사회 혹은 국가, 문화에서 생각하는 ‘최고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제사장’은 가장 먼저 죽는 사람, 가장 먼저 대속의 은혜에 붙들려 자아를 갈갈이 찢은 사람, 그렇게 번제단에 나를 올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이스라엘 백성 및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이런 본문(4~6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애굽에서 바라본 ‘애굽 종교의 제사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에 오염된 생각으로 성경을 바라보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 혹은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인, 영광스런(?)일도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구름’에 대해서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힘’이 없이 감히 ‘제사장, 제사장 나라’ 운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간섭(?)이 무서울 정도로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간섭은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내 죄성과 욕망 반대로 인도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택한 족속, 왕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소유’되는 것이 불편하지만, 가장 기쁜 것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15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entá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