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하 3장 1~16절
1.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이런 마음이 듭니다. “아, 인간은 어쩔 수 없구나. 타락한 인간에게 소망이 없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방법이 없구나.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구나.”라는 영혼의 자각이 스며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을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인물(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입니다. 다윗은 무조건 선한 사람, 사울은 무조건 악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입니다.
성경 인물에 대한 우상 숭배에 가까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사울’같은 사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넬, 이스보셋’같은 사람들을 절대 악인으로 낙인 찍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삶을 살 때 선한 길을 갑니다. 그 반대일 때 악한 길을 걷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걸어간 결과, 그 쓰디쓴 열매를 먹는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내가 손가락질하는 그 인물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영적 경각심을 잊지 않는다면 ‘아브넬, 이스보셋’을 보면서 혀를 차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이 걸어간 길, 그들이 선택한 삶을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본문 7~8절을 보면 ‘아브넬’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변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 근거(3장 38절)를 따라 추론해보면, ‘이스보셋(사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린 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권력의 맛에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6절)
그러나, 나가도 너무 나갔습니다. 7~8절의 행동은 도를 넘은 것입니다. 사울 왕의 첩과 통간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이스보셋’에게 화를 내며 쏟아 놓은 말은 교만의 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게 어디서 감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감히!”라는 말로 함축하여 표현되는 인간 속에 숨은 심령의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가장 뿌리 깊은 인간 죄성의 근원입니다.
“감히”는 내가 주인이라는, 내가 최고라는, 너 따위보다는 내가 낫다는 인간 교만의 밑바닥임과 동시에 끝입니다.
결국 ‘이스보셋’을 얕잡아보는 마음과 분노가 폭발하여 ‘이스라엘(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을 다윗에게 넘겨버립니다.
단순하게 이 일의 결과(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겨 통일 왕국이 된 결과)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흔히 신학자들이 말하는 ‘다윗의 통일왕국’이라는 ‘구속사(救贖史, history of redemption)적 거대담론(巨大談論, meta-discourse)’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일부러 ‘구속사적 거대담론’이라는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로 포장해봤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와 말의 껍데기만 보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다윗을 통해 통일 왕국을 이루신다’라는 맞는 말이지만, 너무 큰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으면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 오늘 내가 돌이켜 걸어가야 할 십자가, 오늘 내가 못 박혀 죽어야 할 연약한 본성’이 보입니다.
3.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보셋의 약점과 악함을 통해 다윗에게 ‘통일왕국’을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신 것은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회개를 통해 ‘통일왕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저질러 놓은 일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수습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종교적 업적, 사명, 헌신 등을 이루어 낸 것처럼 보입니다. 네, ‘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이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질러 놓은 일을 또 수습하셨구나. 내가 앞서 가서 망칠 뻔한 일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셨구나.”라는 마음 말입니다.
조금만 냉정하게 보면 13~16절의 다윗의 요구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미갈’이 첫번째 부인이었지만, 이제 ‘미갈’은 다른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여섯명의 아내와 그에게서 난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도 성경은 객관적인 사실만 서술할 뿐입니다. 정말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사울 왕의 딸(미갈)을 다시 데려 오는 것을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었다면 결코 바른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큰 하나님의 일하심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안타까운 실수와 욕심, 계획 등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가는 오늘이 기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안절부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에 기대어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선명하게 나를 발견하고, 말씀을 통해 선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신뢰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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