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8장 8~22절
1.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수기도, 축복기도’입니다. (너무 이런 용어에 마음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지만, ‘야곱의 아들’로 여겨집니다. 입양이라고 말하기가 어색합니다만, 고대근동의 풍습에는 ‘손자’를 ‘아들’로 입양하는 경우가 실제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렇게 됨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정해질 때, ‘레위’가 빠지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 ‘야곱’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기도해 줄 것을 청합니다.
2.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3~14절을 글로 읽으면 좀 헷갈립니다. 굳이 다시 표현하자면, 요셉은 장남인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에 위치하도록 데리고 왔습니다. 차남인 ‘에브라임’이 야곱의 왼손에 위치하도록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손을’ 엑스(X)자’로 엇바꾸어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동생인 ‘에브라임’이 형 ‘므낫세’보다 더 ‘큰 자’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바로, 구약 성경의 ‘장자권’의 복을 빌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네, 분열왕국 시대에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세워집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중심지였던 ‘세겜’이 첫 수도가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세워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이지, 뜻이 아닙니다. (짧은 지면으로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허락’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거나, 우기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자신의 상황’ 등을 투영합니다. 그렇게 비슷한 ‘사건’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에 너무 익숙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이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쓰임을 받는 것 같고, 뭔가 종교적인 인물과 가까운 것 같고, 뭔가 종교적 행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자신을 ‘특별히 여기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딱 그 정도, 거기까지, 그만큼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3. 어쩌면,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야곱의 변화’입니다. 손을 엇바꾸어 기도하는 야곱을 보고, 요셉은 당황했습니다. 18절에서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대로 기도합니다. 심지어 19절에서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말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지금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누가 장남이고, 차남인지 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야곱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든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질서를 무시한 편애가 얼마나 큰 아픔을 가져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대로 장자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이 있는 곳을 향하여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전합니다. 또 ‘차남, 에브라임’에게 손을 엇바꾸면서까지 오른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고집불통 야곱은 ‘뭐 버릇, 뭐 못 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장남인 ‘므낫세’에게 기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정말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아들 요셉에게 “우리 아버지는 구제불능이야.”라는 말을 들을 지 언정…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는 간곡한 말을 하며,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기도를 합니다.
4. 또 두번째, 달라진 ‘야곱’의 모습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세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딸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말미암은 세겜의 대학살’의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이제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겜’은 정말 중요한 곳이 맞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 처음 단을 쌓은 곳입니다. 세겜은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와 단을 쌓은 곳입니다. 세겜은 야곱의 유언대로 ‘요셉의 뼈’가 묻힌 땅입니다. 가나안 정복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세겜’은 ‘북이스라엘, 야곱의 총애를 받은 에브라임’의 ‘종교성지’가 아닙니다.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나중에 ‘북이스라엘’ 세우면 ‘수도’ 삼으라고 준 땅이 아닙니다.
22절의 야곱의 고백의 핵심은 ‘창세기 34장’에 있었던 그 비극, 어쩌면 ‘야곱 집안의 비극의 시작’인 ‘디나 사건’의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4장 30절’에서 야곱은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쳤다. 저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내 집이 멸망할 것이다’라며 ‘비극의 원인’을 자녀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야곱’, 특히 22절의 고백을 하는 야곱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상대방’보다 ‘나’를 먼저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내가 먼저 바뀌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ai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