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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20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하 2장 12~32절



1. 역사서 중의 하나인 ‘사무엘하’로 돌아왔습니다. 역사서는 말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실제로 일하신 기록입니다. 크게는 한 국가와 민족, 작게는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무엇보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공동체)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공동체)들, 더 나아가서는 무시한 사람(공동체)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역사서를 통해 우리의 삶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환경과 시대가 다를 뿐 사람에게 닥치는 ‘생노병사희노애락(生老病死喜怒哀樂, Whole life)’은 같습니다.

완벽할 수 없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 엎드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야 합니다. 그 일과 사건에 대하여 나는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나 대신 사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2. 사무엘하 1장에서 2장 11절까지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과 ‘왕이 된 다윗(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7년 6개월을 다스립니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8~9절)과 다윗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파의 첫 전투가 기록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두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3장 1절)

‘기브온 못 가’에서 있었던 이 전투(13절)는 단순하게 하나의 전투만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치열한 전투를 기록함으로 두 세력 간의 전쟁이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식할 정도로 잔인하고, 비열(?)하게 싸웁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뒤로 빠집니다. 대신 각자가 섬기는 지도자의 신복들(12명)을 내보내어 싸우게 합니다. 마치 서로 자살을 돕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처럼 싸웁니다.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을 상상해봅니다. (정말 그러기 싫지만…)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한 심리 상태를 생각해봅니다.

각각 12명 중 누구 한명이라도 두려워 도망친다면 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식함 대결입니다. 잔인함 대결입니다. 인간의 잔혹함과 야비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종교성, 도덕성, 땅의 성공 등으로 포장했다고 속으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치명적 약점이 자극 당할 때 감추지 못하고 드러나는 본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붙들고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벌벌 떨어야 합니다. 성경이 지식이 되면 안 됩니다. 기도가 공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내 생각 반대로 하기 위해 읽어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쳐 복종시키기 위해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누는 이 묵상 조차도 지식이 되면 답 없습니다. 머리로 받아들여 그렇게 된 줄 착각하면 더 심각해 집니다.)


3.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전투(전쟁)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없고, 인간의 숨겨진 야망, 분노에 찬 복수, 아니 복수심을 이용하여 자기 정적을 제거하려는 교묘한 술수(3장 22~30절)만 있을 뿐입니다.

‘아브넬’이 ‘마하나임’에서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도 자신의 권력욕이었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는 동생 ‘아사헬’을 막았어야 합니다.

‘아사헬’의 성격(21절, 전리품 마저도 거절하고 끝까지 추격하는 아사헬…)을 잘 아는 ‘요압’은 전투에 임하기 전에 ‘아브넬’을 끝까지 쫓지 말라고 잘 타일렀어야 합니다.

물론, ‘아사헬’도 멈췄어야 합니다. 22절의 기록처럼 ‘아브넬’이 그만 따라오라고 말할 때, 형 ‘요압’과의 관계를 말하며 그만 하자고 말할 때 멈췄어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먼저 멈춘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 묻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2장 1절의 다윗처럼 그토록 세세하게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다윗도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넘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려 기도했다면, 엎드렸다면 ‘끝장’으로 달려가는 미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묻느라, 기도하느라, 엎드리느라, 멈춘 그 순간 ‘나를 향해 날아오는 창끝’을 단 ‘한 치(1 inch)’차이로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래도 ‘아브넬’을 죽여야 다윗이 하루라도 빨리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7년 6개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셨습니다. 그가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길 원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래서 십자가가 좋습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묻는 시간,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생각과 반대로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은혜입니다.

거기서 멈출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좀 느린 것 같아도, 좀 답답한 것 같아도 함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 인도함 받으며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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