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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1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에베소서 1장 1~6절



1.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초기 서신이었던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하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후기 서신입니다. 후기 서신 중에서도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獄中書信, prison letter)’입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기록한 4권의 옥중서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약 3년 동안 머물면서 직접 목회한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에베소 교회’는 참 목회하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였던 에베소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로와 육로가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데미(아르테미스)’를 비롯한 온갖 우상의 신전들이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기 자아의 안위를 위해 온갖 우상 숭배, 무속 행위, 종교 행위, 마술 행위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늘 그랬듯 비난과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두란노 서원’을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9절) 하나님의 백성,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 복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버티고, 견뎌냈습니다.

그 견디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그들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묶이고, 억눌렸던 영혼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도행전 19~20장을 함께 읽으시면 에베소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됩니다. 물론, 사도행전 마지막까지 읽으시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에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를 보낸 배경과 마음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2. ‘두란노 서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건물 혹은 조직체가 아닙니다. (한국의 기독교 출판사 이름도 ‘두란노’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변화된 성도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영혼의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1절)의 거룩한 연합과 모임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벌어진 상황, 사건, 현상에 휘둘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는 성도들의 찬양입니다! 자유할 수밖에 없는,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선포할 수 있는 찬송입니다!

사도 바울과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교인들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제국의 억압, 로마제국이라는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탄의 억누름을 믿음으로 견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비결(?)은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에베소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에베소서 곳곳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1~6절)에서만, 6번(‘사랑 안에서’ 포함)이 나옵니다. 의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찬송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찬양으로 솟아난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외에 저와 여러분을 견디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힘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를 묵상하십시오. 영혼에 새기십시오. 휘몰아치는 세상의 폭풍을 뒤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깊이 머물러 계십시오.”라는 영혼의 감격을 글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의 영적 감격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감옥 밑바닥에서 하늘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의 이끄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묵상은 성경 지식 탐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3절의 시작 “찬송하리로다!”도 주목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과 찬양이 그냥 노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찬송, 찬양이 되는 이유가 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에베소서 전체에 녹아 있습니다.

특히, 2장 1~3절, 하나님을 대적하며,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내가 ‘감히’ 드리는 것이 찬양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찬양은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이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은 이런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 은혜 안에 있기에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중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 음악이라는 포장지, 사람 목소리의 기교, 악기와 음향 장비의 공교로움으로 찬양의 어떠함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까요? ‘찬양 감상’을 위한 찬양, ‘찬양 공연’을 위한 찬양은 성경적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찬양과 찬송…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드릴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심령으로 듣고, 나누고, 함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4.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찬양이 십자가 은혜로 걸러진 찬양이 되길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더욱 든든하게 서길 기도합니다.

갈 수록 세상의 공격은 심해질 것입니다. 인간의 간사함과 연약함은 그 공격 앞에 여지없이 걸려 넘어집니다. 그럴 때, 나의 판단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현상과 사건에 휩쓸려, 내 생각의 감옥 안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 가장 먼저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건과 상황의 파도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십자가 은혜의 바다 안에’ 거하며, 진정한 평안과 승리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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