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7장 1~17절
1. 더위가 물러가는 것을 느끼는 9월의 시작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지난, 1~ 2월에 36장까지 살펴본 ‘창세기’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창세기 전체의 구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구도인 ‘창조-타락-구속’의 구원사적 구도의 시작입니다.
1~2장은 ‘우주와 인간 창조’입니다. 3~11장은 ‘인간 타락, 죄의 심화, 홍수 심판, 재번성, 바벨탑 심판’입니다. 즉, ‘창조-타락’입니다. 그리고 12~50장은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시작되는 구원(구속:救贖, redemption) 역사’의 시작이며,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창세기 37~50장’은 ‘야곱의 이야기이면서, 요셉을 중심으로 한 형제들의 이야기’ 입니다.
2.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거의 주인공처럼 부각되는 ‘요셉’을 볼 때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요셉’은 본받아 마땅한 ‘신앙의 인물’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았던 인간 ‘요셉’은 그저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도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연약함, 허점, 허물 투성이’의 인물입니다.
2~3절의 기록을 좀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요셉’은 17세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했던 행동은 형제들의 실수와 잘못을 말했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듯, 작업복?을 입은 형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고자질하듯 말하는 것은 납득이 어렵습니다. 또한, 자신이 꾼 꿈을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을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아들, 성실?한 사람, 열정?있는 소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까요? 아닙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머지 형제들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 형제들의 반응 역시 잘못된 것이 맞습니다.
결국 우리는 ‘요셉’과 ‘형제들’의 인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야곱의 행동, 훈육 방식’을 냉정한 시선으로 봐야 합니다. 요셉과 형제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교훈하기보다 인간 본성에 치우친 사랑으로 자녀를 대한 야곱, 심하게는 차별한 야곱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3절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것도 너무너무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낳은 첫 아들이었습니다. (창30:21~24) 네, ‘야곱’이 자기 성격대로, 기질대로, 본성대로 ‘편애했던 아내’에게서 낳은 ‘편애한 아들’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3.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않을지 모르지만, 야곱의 실수, 그 가정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기질, 본성, 습성,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 그대로 아내도, 자녀도 편애했습니다. 자신이 익숙한 대로, 살아온 습관 그대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세겜의 일, 디나의 일을 겪었음에도 그랬습니다. (창34장)
그러나, 여기서 끝난다면 ‘절망’입니다. 여기서 절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요셉’을 바꾸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과 요셉’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애굽의 총리 된 것, 마침내 애굽에서 요셉 다시 만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야곱은 변합니다. 형들의 잘못을 들춰내고, 지적했던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넘어가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창45장) 무엇보다, ‘야곱’의 변화가 놀랐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한 뒤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생각했던 ‘베냐민’을 을 보냅니다. 라헬이 낳은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창 43장)
‘야곱의 가족 이야기’ 속에는 ‘구원 역사의 대서사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본성, 인간의 실제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뜬구름 잡는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삶과 직결된 실제적 사건 속을 통해 드러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꿈보다 중요한 것이 요셉이 살아간 삶의 발걸음입니다. 요셉을 잘못 이해하면 딱 ‘영웅담, 위인전’ 수준에서 생각합니다. 물론, 슬쩍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다. 사용하셨다.’라는 종교성 가득한 공치사 정도를 늘어놓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내 모습을 비추고, 십자가의 보혈이 내 심령을 적시고, 성령이 내 영혼을 비춰주실 때가 ‘회복의 기회’입니다. 그렇게 찔리고, 아프고, 부끄러운 것이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돌이킬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 살펴보신 것처럼 ‘이사야 39장의 ‘히스기야’의 안타까운 반응, 지금 허락된 돌이킴의 기회를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 판단, 전인격을 말씀에 비추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자아의 본성’ 반대로 사는 것이 기쁨이 되어 진정한 축복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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