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18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창세기 46장 28~47장 12절

1. 요셉의 이야기, 야곱 가족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그려본다면 ‘감동적인 오케스트라 선율’이 배경음악으로 더해진다면 딱 어울릴 것입니다.

유다의 길 안내로 야곱과 그 모든 식솔들이 ‘고센 땅’에 도착합니다. ‘고센 땅’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나일강 하구 동쪽에 위치한 지역’을 유력하게 봅니다. 그리고 약 400년 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으로 건축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출애굽기 1장 11절)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6장28~30절은 ‘야곱과 요셉의 부자상봉’입니다. 46장 31~34절부터 47장 1~6절까지는 ‘고센 땅, 정착 과정’입니다. 47장 7~12절은 ‘야곱과 바로 왕의 만남’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자칫하면 큰 오해를 낳게 됩니다. “’요셉의 지혜’로 ‘고센 땅’에 거주했다. 그렇게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야곱이 세계 최강국의 왕, 바로에게 축복기도를 해줬다.”라는 식으로만 해석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해석 말입니다.


2. ‘꿈은 이루어진다.’, 혹시 오늘 기록에서 ‘요셉이 꾼 꿈(창37:7~9절)’이 생각 나지 않으십니까? 특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가 기억나십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야곱’이 ‘총리 요셉’에게 절을 한 줄 압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저 만나서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운 것’이 다입니다. 어머니 라헬은 이미 죽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바로 왕’을 만나서도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바로 왕’을 향해 절은 커녕, “내 나그네 길… 내 나이가…”라고 말합니다. 과거 왕을 만날 때 쓰는 ‘주, 주인’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로를 축복’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내일 본문과 이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애굽 왕, 바로’는 흔히 말하는 고대 근동의 최강국, 대제국의 황제가 아닙니다. 크게는 나일강 주변의 작은 국가, 작게는 도시국가 정도의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애굽 왕, 바로’가 명실상부 ‘큰 나라’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이 비축해둔 곡식을 가지고, 흉년 때 주변 국가와 심지어, 애굽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토지까지 다 사들입니다. 강력한 중앙집중 국가의 기틀을 닦아준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가까이하면 복 받는다’라는 전형적인 기복적 해석을 하게 됩니다. 또 반대로 ‘흉년 때 폭리를 취하듯 곡식을 팔아서, 토지까지 몰수한 것이 옳은 것이냐?’라며 ‘기독윤리’ 혹은 희미한듯 ‘공산사회주의적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3. 사실,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고센 땅’에 거주하게 한 것은 ‘엄청난 계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에 살면서 알게 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종교적 혹은 문화적 이유로 목축을 적극적으로 혐오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증히’로 번역된 ‘토에바(toebah)’를 ‘종교성’을 빼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목축 자체가 ‘힘들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이었기에 기피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기, 우유, 치즈’를 먹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주는 ‘가축’을 돌보는 것은 싫었던 것입니다.

이집트 문헌에는 ‘왕실의 가축을 전문 목축업자들에게 맡긴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라암세스 3세’는 3,264명의 양치기를 고용했는데 대부분 외국인들이며 그들은 왕실의 공식적인 관리로 임명되어 일반 외국인과 달리 법적 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오늘 본문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47장 4절에 형들이 바로에게 말한 “거류하고자…” , 히브리어 ‘구르(gur)는 ‘일정 기간’ 잠시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형들에 말한 47장 6절의 “거주하게…”, 히브리어 ‘야샤브(yashab)’는 ‘정착, 영구 거주’를 의미합니다.


4. 좀 장황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웅적, 기복적, 우상적 성경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분명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저런 직업과 생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기독교인보다 비기독교인들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거래 속에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네, 돈을 법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축은 하기 싫고, 목축을 통해 얻는 ‘가축의 노동력 또 고기, 우유, 치즈 등’은 먹고, 누리고, 이용하고 싶었던 ‘바로와 애굽 사람들’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고 계십니까? 네, ‘고센 땅’에서 험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하십니다.

애굽에 왔으나, 여전히 묵묵히 ‘목축’을 하는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바로 왕’은 ‘요셉’의 지혜(?)로 엄청난 부를 획득했으나, 묵묵히 ‘목축’을 하는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못 만났습니다.

어쩌면 ‘야곱의 축복’ 조차, 자기 중심으로 이해해서 “여호와라는 신을 믿는 야곱이 축복해줘서 내가 이렇게 복을 받았네.”라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딱,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땅의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에 마음이 빼앗겨, ‘하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면서 ‘험악한 세월’을 지나, ‘출세(?)했다’가 아니라, 영원히 거주할 곳, 천국을 향해 ‘십자가 붙들고 걸어가는 나그네’라고 고백하게 되길, 그렇게 우리와 함께 예수님 안에서 ‘나그네의 길’을 걷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12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