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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17일 2020년 목요일 묵상

본문: 창세기 46장 1~27절

1. 오늘 본문은 야곱과 그의 가족의 전환점입니다. 전환점이면서 동시에 한고비, 또 한고비를 넘는 과정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거주했던 헤브론 지역(창35:27)을 떠나, 브엘세바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최남단인 ‘브엘세바’를 지나면 ‘애굽’입니다.

무엇보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예배를 드렸던 중요한 장소이며, 거주지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야곱이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1절)

2~4절은 야곱에게 친히 나타나신 하나님, 야곱에게 격려와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5~27절은 애굽 여정에 나선 야곱의 가족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중에서 8~27절은 ‘야곱 가족의 명단(족보)’입니다.


2. 오늘 말씀을 ‘드디어 애굽으로 향하는 야곱’, 심지어 ‘애굽으로 입성하는 야곱’,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한 첫 발걸음’ 등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2절의 “그 밤에”를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브엘세바’는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던 곳입니다. 할아버지(아브라함), 아버지(이삭), 형(에서)과의 추억, 갈등, 아픔 등등이 서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자신도 ‘아버지,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을 끝으로 ‘조상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야 합니다.

무슨 생각,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흔히 말하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으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감히, 한국에서 미국으로 떠나올 때, ‘이랬니 저랬니’라고 말하기도 민망합니다.)

야곱에게는 “그 밤에”라고 표현할 시간이 많았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던 그 밤, ‘라반 삼촌에게서 도망치던 그 밤’, ‘형 에서를 다시 만나기 직전의 그 밤’, ‘디나 사건이 있은 후 그 밤’, ‘요셉이 죽은 줄 알았던 그 밤’ 등 정말 많은 “그 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그 밤들’을 지낸 뒤, 오늘 본문의 “그 밤”은 정말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든 그 밤들’이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듯 지나갔을 것입니다.

바로,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특히 ‘희생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대속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제물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는 제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네, ‘회개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난 날을 다시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3. 우리는 새로운 출발 앞에서, 특히 그 출발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셨네요. 하나님이 길 열어 주셨네요. 하나님이 역사하셨네요. 하나님이 인도하셨네요. 하나님이 부르셨네요.”라는 식의 부추김(?)을 들을 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말로 ‘영전(榮轉)했다’는 식의 평가를 들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내 맘 속에 ‘새로운 출발’이 지난 날의 ‘종교적 노력, 헌신, 봉사’등에 대한 ‘결과, 보상, 대가’라는 식의 생각이 든다면 빨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 앞에서 ‘내 삶을 철저히 돌아볼 시간, 회개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다. 새로운 출발 앞에서 ‘돌이키고, 반성하고, 끊어내는 시간’을 가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위험한 출발입니다.

야곱이 왜 두려워했을까요? 애굽의 삶이 불투명해서 그럴까요? 그 옛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생한 기억이 겹치면서 애굽에서 고생할 것 같아서 그럴까요? 그런 것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입니다. 수레(가마)를 타고 갑니다. 애굽 왕 바로의 온갖 하사품을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이유는 야곱, 자신 때문입니다. 죄인인 그의 본성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연약한 점이 많은 자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야곱이 ‘애굽이라는 낯선 땅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다. 애굽에서 큰 민족을 못 이룰까 걱정했다. 자식들이 애굽에서 큰 일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다’는 식의 저급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야곱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붙든 것은 ‘동행의 약속’입니다. (4절) 과거 ‘밧단아람’으로 갈 때 ‘벧엘’에서 주셨던 약속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와 같은 ‘동행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동행’은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동행을 ‘보디가드’ 대동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야곱은 경험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를 때, 이미 야곱과 동행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비극적 순간에도 하나님은 동행하고 계셨음을 체험했습니다.

지금 ‘야곱’은 여전히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야곱이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희생제사, 대속의 은혜, 십자가 사랑을 놓칠 수 없다.’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바라볼 때는 절망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속죄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겼습니다. 담대함이 솟아올랐습니다.

‘땅의 것, 자아를 충족시키는 것’에 기대고, 소망 두었던 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것, 자아를 버리게 하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힐 때마다 보이는 ‘하늘의 것’에 소망두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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