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5장 16~28절
1. 오늘 본문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관한 소식이 ‘애굽 왕, 바로’에게 전해진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셉의 큰 울음 소리가 바로의 궁에까지 들렸으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왕실에 경사가 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만큼 ‘총리 요셉’이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와 신임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 형제들의 감격적인 상봉’에 관하여 ‘바로’는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에 임명한 ‘바로’가 요셉을 검증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단순히 꿈 해몽했다고 총리의 자리에 앉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즉시 불러 요셉이 약속한 가족들의 초청과 생계에 관한 것들(10~11절)을 최종 승인(19절)합니다. 그리고 애굽 땅의 최고의 것들을 공급할 것을 약속합니다. (18절)
그렇게 형제들은 아버지와 그의 가솔들을 데리러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들은 ‘야곱’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애굽’으로 갈 것을 결정합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갈등’의 해결, 그리고 그 해결 후에 주어진 ‘축복’에만 마음이 빼앗기면 진정 귀중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제발, ‘기름진 것, 수레, 나귀에 실은 양식, 받은 옷’ 심지어 ‘베냐민에게 더 많은 옷과 돈을 준 것’ 따위에 관심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받은 것의 풍성함보다 요셉의 삶, 요셉과 그 형제들의 만남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를 비롯한 모든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긍정적 시각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신실함, 그의 지혜로움, 그의 열심 등에 대해 두 번 언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형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형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애굽’에서 ‘총리 요셉’은 유명인을 뛰어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기인 수준이 아니라, 흉년에서 자신들을 지켜준 구원자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요셉의 평전’이 출판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을 주제로한 영화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 스토리의 영원한 악역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들’을 복수해도 누구 하나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얼마간의 ‘곡식과 돈’을 쥐어 주고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기만 해도 엄청난 찬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수는 커녕, 형들의 목을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용서했습니다.
3.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상봉 소식이 ‘애굽 왕, 바로’에게 가장 먼저 전해진 것은 ‘보고’ 혹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울음’이었습니다. 물론, 들으라고 일부러 더 큰 소리 질러 댄 ‘울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은 ‘바로’에게 자신이 형제들을 만난 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소식이 ‘바로’를 비롯한 애굽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은 ‘회개의 울음, 용서의 울음, 진심 어린 울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된 요셉의 절제와 기다림을 봐야 합니다. 처음과 두번째 울음까지는 골방에서 홀로 울었습니다. 총리의 권한을 절제합니다. 바로 왕을 독대하여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음에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형제들과 함께 ‘회개와 용서’의 ‘울음’을 터뜨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생명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야곱을 살렸고, 가나안 땅의 온 가족들을 살렸습니다. 요셉, 본인은 몰랐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살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영적 나비 효과’입니다. 나의 회개는 작은 영적 나비의 작은 날개 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것이기에 반드시 큰 영적 파장으로 우리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내면에서 ‘회개의 울음’이 터져 나와 모두를 살리는 생명수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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