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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9월 14일 2020년 월요일 묵상

본문: 창세기 44장 18~34절


1. 주말에 읽으신 것처럼 ‘야곱의 아들들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야곱의 내려놓음’이었습니다. “내가 자식을 읽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야곱의 결단은 사람의 기대와 바람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은 ‘요셉의 집’에 초청됩니다. 요셉의 집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애굽의 총리(요셉)’가 가족들 안부를 너무 상세히 묻습니다. 거짓말처럼 형제들의 위아래를 압니다.

이상했지만, ‘시므온’도 풀려났습니다. 다시 곡식을 사서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요셉이 ‘곡식 자루’에 ‘은 잔’을 넣었습니다. 결국 도둑으로 몰렸습니다. 일이 또 꼬였습니다.

이 때, 꼬인 사건을 해결한 것이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의 변화가 있습니다. ‘요셉의 총리 됨’ 중심으로 ‘창세기 37~50장’을 읽으면 ‘기복신앙’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지만, ‘유다의 돌이킴’을 중심으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물론, 유다 중심의 해석이 과해서 ‘유다 혈통’을 신성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은 잔’이 자루 속에서 발견된 것은 누명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지시한 것입니다. 정말 억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유다’는 항의, 항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인정합니다. 16절에는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요셉이 ‘그잔이 발견된 자만 종(노예)’로 삼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18절 이하에서 ‘변론, 변명, 핑계’가 아니라, 그저 담담히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33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유다의 목소리는 어땠을까요? 유다의 눈동자는 어땠을까요? 눈동자도 목소리도 떨렸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심령에 ‘아버지’의 얼굴과 20여년 전 자신이 팔아버린 ‘요셉’의 얼굴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울음과 동생의 울음이 번갈아 그의 심령을 때렸을 것입니다.

사실, 이미 그 아픔과 반성의 시간을 이미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다시 애굽까지 ‘죄인의 얼굴,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내려왔을 것입니다.


3. 오히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극진한 대접만 받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죄스러울 지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 창세기 43~44장을 ‘유다의 희생, 탄원, 호소’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에 대한 예표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회개’입니다. 말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열매를 감당할 각오를 한 것입니다. 물론, 공명심, 영웅심에서 기인한 “뭐, 내가 책임지면 된다.”는 식의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회개합니다. 그런데 꼭 따라오는 너덜너덜한 생각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이렇게 저렇게 되겠지…”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한 ‘구원과 회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펼치는 기대감을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정말 놀라운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함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순전한 사랑이 솟아오릅니다.

혼탁해진 내 영혼이 성령의 깨끗케 하심으로 다시 맑아지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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