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3장 1~15절
1. 창세기 43장은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한 인물이 중요한 결단을 하는 장면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야곱’의 결단, ‘야곱’의 인생 전환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37장’부터 ‘야곱의 이야기’에 이어 ‘요셉의 이야기’로 바뀌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좁은 관점이 오해를 낳아 ‘총리 요셉’, ‘요셉을 총리로 세우신 하나님’ 정도에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좀 더 큰 시각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해석해야 합니다. 바로, ‘야곱의 이야기’ 속에 요셉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마지막인 창세기 50장까지는 ‘야곱과 그의 가족(아들)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 크게 ‘유다의 이야기(39장)’와 ‘요셉의 이야기’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넓은 시각에서 ‘요셉’을 봐야 ‘요셉 우상화’ 심지어 ‘요셉 신격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 역시 ‘다윗왕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2. 사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유다의 고백, 행동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맞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9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를 유다의 희생적 결단으로 봅니다. 막내동생과 가족 전체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유다는 다윗의 조상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의 뿌리(후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다’라고 해석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동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를 통해 ‘다윗왕’이 태어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유다의 회개’ 때문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말과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요셉을 팔아버리자는 의견을 낸 것은 유다였습니다. (창37:26~27절) 유다가 요셉을 팔아버리지 않았다면, 르우벤에 의해 요셉은 구출되었을 것입니다.
제발, 이런 말은 마십시오. “요셉이 팔려가야 총리가 되고, 출애굽이 가능했다.”라는 식의 반응은 정말 위험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잘못으로 초래된 결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포장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죄악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차근차근 이루어 가시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핵심적으로 봐야할 것은 ‘유다의 회개, 돌이킴, 책임짐’입니다. 그렇게, 고집불통 야곱은 ‘자기 아집, 편애, 욕심’의 상징인 ‘베냐민’을 내려놓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네, 하나님의 철저한 간섭으로 말미암은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가 ‘유다’도 살리고, ‘야곱’도 살리고, ‘요셉을 비롯한 온 가족’을 살린 것입니다.
3. 구속사적 해석은 중요합니다. 알레고리 해석도 좋습니다. (경우에 따라, 11절의 ‘유양, 몰약, 향품 등’을 동박박사가 예수님에게 가져간 예물로 비유해서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해석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듣고, ‘야, 기막힌 해석이네’정도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지금 내 앞에 있음을 믿고, 그 분의 십자가에 엎드려 못 박힘을 결단해야 합니다.
유다도, 야곱도… 또 르우벤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은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길 기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상세하게 기록은 하지 않습니다만,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합니다.)
‘요셉을 만났을 때도, 동생과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도, 감옥에서 나왔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것도, 곡식 속에 담긴 돈을 발견했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들은 ‘야곱’은 겉으로는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홀로 있을 때… 잠들기 전… “하나님, 뭔가 이상합니다. 인간 야곱의 본성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분명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일 가운데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일, 소소한 일’ 가운데 우리에게 더 세밀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세밀한 주님의 일하심 가운데 흐르는 ‘생명의 일’을 발견하고 붙들기 위해 ‘내 영혼에 굳은 살처럼 붙어 있는 사람의 생각, 판단, 본성’을 십자가로 긁어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 가운데 ‘진정한 십자가의 길, 그 높은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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