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2장 10~33절
1. 오늘 본문에는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들이 성물(聖物, sacredness, separateness)을 먹을 수 있는 경우와 먹지 못하는 경우에 따른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16절)
그리고 제물(이것 역시 성물에 포함됩니다.)로 드리는 짐승의 상태(흠이 없는 것)와 제물로 드린 짐승을 섭취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17~33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속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특별함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성물은 오직 제사장과 제사장의 가족들(함께 거류하는 사람 포함)에게만 허락된 것이라고 강조하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제사장’은 구별된 사람들이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들 중에서 구별하여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모든 대속의 제사, 대속의 은혜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3대 직분,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완성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제가 예수님의 자리에 올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제사장일 수 없습니다. 목회자 역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따라가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저는 이런 고백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목회자를 하나님이 세우신 종교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이해하고, 바라보고, 섬기시는 여러분이 계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2. 이런 본문을 볼 때 제사장이라는 사람의 특별함, 직분의 특별함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우상처럼 여기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직분을 완성하신 이후 우리는 같은 인격입니다. 서로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질서 안에서 존중과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구별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에 대해 설명할 때 ‘구별된 것이 거룩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별됨=거룩’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레위기’전체 아니, 성경 전체를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 그 중에서도 더욱 구별된 제사장을 통해 구별된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세상의 신, 아니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 신이라고 말하지만 사탄 마귀’에 불과한 존재들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별된 분이십니다.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 ‘거룩’은 십자가에서 빛을 발합니다. 범죄한 인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아버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창조하신 분이 그들을 다시 품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구별됨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신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구별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3. 특별함이 아니라, 구별됨을 기억하십시오. 종교에 빠지면 십자가 복음이 특별함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레위기와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기적인 특별함’으로 다가옵니다.
‘난 달라. 난 특별해.’라는 자기 내면의 타락한 음성에 속아 넘어 갑니다. 좀 저속한 표현이지만, ‘저것들과…’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을 겁니다.
제사장들… 결국 시간이 지나며 그런 ‘이기적 특별함, 종교성에 찌든 특권의식’에 빠졌습니다. 여지없이 빠졌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자기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합니다. 매일 죽어야 합니다. 매순간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이런 나를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4. 마음… 겉으로 드러난 ‘교양 있는 척하는 모습’이 아니라, 심령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내가 간과하기 쉬운 심령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의 영적 상태를 똑 바로 쳐다봐야 합니다. 사실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범죄한 실존, 자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비추심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의 빛이 비추는 내 속사람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나를 비춰봐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냥 종교 생활입니다. 그럴 싸한 종교로 자아를 더 깊은 어둠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자아성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아성찰’과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구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5. 오늘 본문에 ‘흠이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흠이 없는 것을 드리라는 것은 단순하게 좋은 것, 최상품을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심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상태를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아니, 믿는다고 말하는) 인간의 교묘함을 이미 지적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묵상해보십시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충 믿습니다. 가려서 믿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믿습니다.
그러다 수틀리면…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어떤 것이 걸리면… 자기 맘대로 합니다. “몰라. 뭐 어때…”라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하게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과 믿음이 날마다 더 선명해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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