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5장 1~13절
1. 이사야 55장은 하나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다함이 없는 긍휼의 노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 영혼의 갈증으로 목말라 죽어가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오늘 본문보다 잘 표현된 곳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1절은 ‘요한복음 7장 37~38절,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을 관통하는 말씀입니다. 즉, ‘처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선포임과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진정한 목적이 오늘 본문(이사야 55장)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2. 성경이 말씀하는 ‘목마름’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안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목마름’을 영적으로 표현한다면 ‘자기 죄성에 대한 절대 절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방황, 영적인 절대 절망’ 앞에 서 본 사람은 오늘 본문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이유, 성경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영혼의 갈증(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허망한 것! 2절의 ‘양식(糧食, meal, food: 영혼의 양식) 아닌 것’을 쫓아다니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또한 허망한 것을 쫓아다니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던 사람들에게도 별로 다가오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럭저럭 ‘양식이 아닌 것’들을 양식이라며 채워 넣어 육신의 배가 부른 사람들에게는 종교성 치장을 위한 말씀일 뿐입니다.
3.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1~2절을 깊이 묵상하며, 내가 쫓아다니는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할까요? 영혼의 갈증으로 죽어가는 나에게 십자가에서 흐르는 생명수를 값없이 주시는, 그러나 가장 큰 값을 지불하신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할까요?
6~7절을 영혼으로 읽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발버둥 칠까요? 가장 가까이, 내 안에 계시지만, 헛된 것에 마음이 빼앗겨 가장 멀리 밀어내 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쓸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행하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진정한 양식을 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나는 목마른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붙들리지 않으면 죽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멸망 길로 갑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영혼의 배고픔이 없기 때문에 참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 좋지 못한 것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자기도 모르게 (때론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4. 제 개인적으로 오늘 말씀은 많이, 아주 많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의 문맥, 그 상황을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명절(초막절) 끝날’에 오늘 본문(이사야 55장)의 핵심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그려보았습니다.
당시, 초막절에는 중요한 종교 행사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실로암 연못의 물을 떠서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농사를 잘 짓기 위함이었습니다.
뭐,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 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초막절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 땅의 양식에 마음 빼앗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양식이 아닌 것을 구하기 위해 진정한 양식인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악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종교의식의 정점에서 “나를 믿는 자! 내가 이룰 대속의 은혜의 완성, 십자가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네 안에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 내가 살 것이다.”라는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의 선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그리스도인 포함)은 ‘영혼의 갈증’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지고, 덜 가졌을 뿐 참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땅의 것’에 대한 모자람, 상실, 결핍에 대한 감정을 ‘영혼의 갈증’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범죄한 인간은 예수님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영적 목마름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세상의 음료수로 영혼의 목마름을 잠시 달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 포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세련된 종교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뿐입니다.)
6절의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는 어떤 미래의 날이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야만 할 때는 항상 현재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영혼의 목마름으로 영혼의 밑바닥이 쩍쩍 갈라진 것을 경험해봤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런 영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의 주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붙든 십자가의 생명으로 인도함 받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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