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39장 1~8절
1. 오늘 본문은 36장에서 시작된 히스기야 스토리의 마지막입니다. 금요일 말씀 드린 것처럼 ‘세가지 이야기’ 중 끝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끝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39장을 보면서 ‘충성스런?, 신실했던?, 기도했던? 히스기야는 살려 주셨다. 그가 죽은 뒤에 바벨론이 침공했다. 그렇게 환란에서 건짐 받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처럼 무책임한 해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직, ‘바벨론은 약소국, 신생국’입니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바벨론이 강대국이 된 후에 ‘유다’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둑에게 금고를 보여줌으로 ‘절도 욕구’를 불러 일으킨 것과 같습니다.
2. 다시말씀 드리지만, ‘히스기야’라는 신앙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가 땅에서 경험한 ‘기도응답 받음, 기적적인 축복 등’이 그의 삶의 진실을 증명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사람도 신격화, 절대화,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따라간 ‘진리의 가치’,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린 영혼의 자세’를 봐야 합니다.
금요일에도 함께 나눴듯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히스기야 스토리’를 이렇게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 있습니다.
그 의도는 이렇습니다. “히스기야… 정치적으로 앗수르의 위협을 기적적으로 넘어갔다. 개인적으로는 죽을 병에서 극적인 치유를 경험했다. 그것도 기도로, 여호와의 능력으로 극복했다. 하지만, 히스기야 역시 죄인의 한계를 가진 인간일 뿐이다. 그가 끝까지, 죽어도 붙들어야 했던 것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리는 것’외에는 없었다.” 바로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36~39장이 기록된 것입니다.
3. 안타깝게도 성경을 ‘신앙 위인전’으로 읽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인물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은 ‘각 인물’의 신앙 영웅적 삶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간 ‘진리! 십자가 대속의 은혜의 가치, 생명의 가치’입니다.
저는 ‘이사야 39장’을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또 두렵습니다. “뭔가 이룬 것이 있을 때, 얻은 것이 있을 때… 너무도 극적인 맛깔스런 종교적 경험이 있을 때…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멋지게 포장까지 해서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축복을 드러내려는(물론, 은근히…) 내 속의 ‘자랑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비행기를 태울 때, 칭찬을 퍼부을 때, 고도를 낮춰야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에 알러지 반응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공비행’ 정도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4. 신앙 영웅적 요소를 빼고, 담백하게, 천천히 ‘히스기야 스토리’를 처음부터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8절의 ‘히스기야의 반응’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8절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는 그 일 때문에 망한다. 어떻게 해도 망한다. 무조건 망한다’라는 뜻일까요? 그래서 8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는 것이 무슨 뒤늦은 ‘순종?’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7절에 ‘네게서 태어날 자손이 바벨론으로 잡혀간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 나에게 다시 회개의 기회가 왔구나!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려 돌이킬 기회가 왔구나!”이렇게 반응했어야 했습니다.
짧은 지면으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히스기야 왕’ 이후 등극한 그의 아들 ‘므낫세’는 남유다 멸망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12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38장 5절의 기록처럼 그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은 후 태어난 아들입니다.
네, 어린 시절 아들 ‘므낫세’가 본 아버지, ‘히스기야’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39장에 기록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나, 1~4절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7절의 경고?를 하시지만, 당장의 심판을 유예하십니다. 이유는 하나! ‘돌이켜 생명의 길’로 나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그리고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 가운데 우리의 끝은 ‘십자가 은혜로 돌이킨 마지막’이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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