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37장 1~20절
1.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다시 ‘이사야 36~39장’의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36~39장은 남유다의 히스기야왕(다윗 이후 가장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으로 평가됨)과 연관된 세 가지의 사건에 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이 세 사건은 시간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36~37장은 B.C 701년,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당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39장은 대략 B.C. 704년에 있었던 것으로 아직은 신생국가인 ‘바벨론’이 히스기야 왕의 치유를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것입니다. (이 일이 훗날 바벨론의 침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38장의 ‘히스기야 왕의 치유 사건’은 39장의 사건이 있기 적어도 ‘몇 개월 전’의 일입니다.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왜, 굳이 시간 순서로 사건을 배열하지 않았을까?”입니다. 제가 읽은 주석서 중에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길을 열어준 히스기야의 경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람, 히스기야의 공로’로 흘러가게 됩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사람, 히스기야를 이끌어 가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히스기야 역시 잘하는 것 같았지만, 한계를 드러낸다. 사람에게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친히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대단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제발 마음 빼앗기지 말아라.”를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39장은 오는 월요일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2.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에만 초점을 맞추면 진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를 ‘지성이면 감천’ 수준의 종교 행위에서 이해하고, 딱 그 수준에서 맴돌게 됩니다.
물론, 14~20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사람보다,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36~38절에 기록된 ‘기적의 결과물?’를 가져온 종교적 노력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남북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신앙’을 유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속사람, 영혼,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떠났다’기보다, 자기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며, 자기를 만족시켜주는 이런 저런 신적 존재들 사이를 왔다갔다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존재라면 ‘여호와’ 건, ‘바알’이건, ‘애굽의 신’이건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제발, 14~20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를 ‘위대한 신께 드리는 찬양, 가장 강력한 신이신 여호와께 드리는 순종 선언, 믿음의 맹세’정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정말이지, 남유다 사람들이, 역대 왕들이 이런 기도를 얼마만에 드리는 것입니까? 대체 얼마만에 하나님께 아뢰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까?
저는 5~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당신의 백성, 자녀들과 대화하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6절의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앗수르 왕이 나를 능욕한 것, 난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아. 그런 걸로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들이 능욕한다고 능욕당하지도 않아. 난 그저 너희가 나에게 찾아왔다는 게 기쁘구나.”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기도의 결과물’에 집착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면 위대한 일이 일어납니다.”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영적대화’가 기도입니다. 성경구절을 사람 생각으로 붙잡고, 입으로 “될 줄로 믿쒭니다!”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영적 관계 회복’을 위해 ‘회개’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나가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중심의 진정한 회개를 행동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혹시라도 3절의 ‘환난, 책벌, 능욕의 날’을 ‘여호와 하나님이 능욕을 당한 것이 너무 분하여 옷을 찢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큰일 납니다.
또한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은 “앗수르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으니 하나님이 싸워 이겨주십시오.”가 아닙니다! “회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하시고, 돌이키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렇게 4절은 “저런 말을 듣게 한 것은 우리의 죄악과 범죄 때문입니다.”라는 히스기야 왕의 내면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붙들고 다시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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