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35장 1~10절
1. 이사야 35장 ‘휴~’하며 한숨을 돌릴 것 같은 내용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로 시작하는 찬양곡의 가사가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이사야 11장’과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작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기 위해 깨끗하십니다. 잘못된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도려내십니다. 그래야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적인 표현임과 동시에 사실성에 기반한 실제적 비유입니다. 철저한 절망이 완전한 소망으로 바뀌는 것을 자연환경(광야, 사막), 불치병(시각, 청각장애), 동물(사슴, 승냥이)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1~2절은 회복과 구원에 대한 기쁨을, 3~4절은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5~7절은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것을, 8~10절은 구속의 은혜 받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 자칫, 오늘 본문은 21세기, 소위 선진국 사는 사람, 좋은 환경, 기본적인 건강상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간접 혹은 생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고대근동의 황량한 광야와 뜨거운 사막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달랐을 것입니다. 병원이라는 시설은 커녕 단어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망은 단순히 ‘현실의 삶, 이 땅의 삶’이 변화되는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궁극의 구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8~10절에 기록된 ‘구속함의 은혜, 속량함의 은혜’로 말미암는 ‘영혼의 구원’까지 연결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 예루살렘’이 아니라, ‘생명의 시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4절을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보복, 갚아주심’을 사람의 개념에서 이해하면 낭패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억울함을 보복해주는 ‘해결사’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빚진 것 따위를 대신 갚아주는 ‘보증인?’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대적하십니다. 죄를 짓게 유혹하는 사탄,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육체를 심판(보복)하십니다. 그냥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지불, 갚으셨습니다.
3. 이 놀라운 ‘구속, 대속, 속량의 은혜’는 사람이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서 던져주듯 주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내려오셔서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4절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 있습니다. 조심스런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역설적이게도 복음이 다시 선포되어야 합니다. 온갖 잡다한 개념이 뒤섞여 흐려진 ‘십자가 복음의 진리’, ‘범죄한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예수로 산다’는 이 진리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각종 ‘종교 껍데기로 둘러 쌓인 예루살렘’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만이 흐르는 시온’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내 전인격, 전존재를 드려 ‘십자가에서 흐르는 구속함, 속량함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시온의 대로는 형통을 위한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시온의 대로는 십자가로 닦으신 생명의 길입니다. 오히려 좁고, 고통스러운 ‘자기 부인(否認), 자아 죽임’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야만 ‘영영한 희락, 기쁨, 생명, 소망’이 있습니다. 이 진리가 믿어지고, 믿어진 진리대로 사는 것이 기쁨인 사람만이 ‘구속함을 받는 자’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삶, 죄악된 본성을 거스르는 삶, 돌이켜 회개하는 삶’이 싫다면 그 순간 ‘십자가 복음을 놓친 사람’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는 ‘구속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패역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붙드는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삶이 ‘시온’으로 변화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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