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6절
1. 이제 ‘데살로니가전서’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 To share one’s pains and joys)’입니다. 짧았지만, 사도 바울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공유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함께 기쁨을 나눴고, 복음 때문에 함께 어려움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처음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게 된 계기를 기록합니다. 3~1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마음의 자세와 삶의 태도로 전했다는 것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기억하게 합니다. 13~16절은 복음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과 그들과 대비되는 유대인들 모습을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뒤 유대인들은 그에 대해 비난과 비방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거짓된 것이고,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십자가 복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견디고, 버텨냈습니다. 기적처럼 십자가 복음을 지켜냈습니다.
2. 이 소식을 사도 바울이 들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감격과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데살로니가’에 간 것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헛되다”로 번역한 헬라어 ‘kene’는 ‘빈, 공허한(empty, vain)’의 뜻을 가집니다. 이 문맥에서는 ‘실패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라는 곳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경험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체류기간도 짧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다 보면 별의 별일이 다 있지… 거긴 그냥 지나치는 곳이었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도 실패한 것 없이, 헛된 것 없이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그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나간 것 같은, 지나친 것 같은 모든 시간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 생각으로는 그저 덮어두고, 적당히 위로(?)하고, ‘그렇겠지…?’라며 흘려버리고 싶은 것들 조차 하나님은 품고 계십니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끝까지 십자가 붙들고 버틴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귀한 열매를 허락하십니다!
3. 따라서 바울이 쏟아내는 듯한 3~9절의 이야기는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죠?!”라는 ‘자기 내세움’이 아닙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아, 결국 하나님께서 열매를 거두시기 위해 ‘나’라는 인간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선한 마음, 정직한 마음, 간사하지 않는 입술, 탐욕의 껍데기를 뒤집어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구나.”라는 고백입니다.
종교인의 대표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얼마든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는 그런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다릅니다.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참 사랑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사심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교가 말하는 도덕 혹은 윤리와 완전히 다른 출발점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개선과 노력을 통한 선한 결과물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새생명으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열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통해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4. 십자가 복음은 말로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죽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를 따라 이미 이루신 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이라는 표현은 대단한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 대신 예수님께서 사십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여전히 당신들을 위해 목숨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라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가르친 십자가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전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 받은 것입니다. (13절)
정말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사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종교(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역 등)라는 가장 고상한 껍질을 뒤집어 씌워서 인간의 이익을 위해 행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잘 되게 하려고 기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나 대신 행하실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이 기쁨이 되고, 내가 죽은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능력이 되는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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