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29장 1~14절
1. 오늘 본문 ‘이사야 29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돋보기에 햇빛이 모이듯 ‘남유다’, 바로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 가장 종교적이라 자부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1~4절을 통해 분명,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과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곧 바로5~8절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덮어놓고 선택 받은 자는 버림 받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범죄하였으나 자녀 삼으셨기에 버리지 못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애끊는 마음을 봐야 합니다.
9~14절은 스스로 맹인이 된 줄도 모르는 남유다 사람들, 너무도 익숙한 종교적 환경에 둘러 싸여 영적 교만과 착각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탄식입니다.
2. 말씀, 1절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은 그냥 우십니다. 대성통곡하십니다. “슬프다”는 가장 깊은 탄식과 울음의 시적 표현입니다. “아리엘”에 대해서는 ‘남자의 이름’ 등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제물을 태우던 ‘번제단’ 즉, ‘하나님의 제단’을 의미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는 ‘번제단’이 있는 ‘성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 해마다 절기를 지내는 곳’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2~3절을 보시면 ‘종교성으로 높아지고 교만해진 그들’을 ‘낮아지게 하실 것’을 대조적으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남유다’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유다를 공격하는 세력을 징벌하시고, 물리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5~8절)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23~35장까지의 예언은 ‘히스기야 왕’ 때 주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22장과 36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하나님의 역사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열왕기하 18장, 역대하 32장)
그런데 ‘남유다’는 어땠습니까? 잊었습니다. 새까맣게 잊었습니다. 바벨론이 침공해올 때도 여전히 교만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3.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빠져드는 ‘의로움’의 결과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니 대놓고 말씀 하셔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영어 번역본(NAS) 중에는 “입술로는”을 아예 ‘lip service’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를 원어 의미를 좀 더 부각해서 의역하면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단지) 배워서 익힌 인간의 계명일 뿐이다.’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조차도 13절은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길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네, 아무도 13절의 “이 백성, 그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4절을 기억한다면 13절이 나 자신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14절의 일을 이루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13절의 패역한 ‘그들, 이 백성’이 ‘나’라고 고백합니다.
14절의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 여호와께서 다시 베푸시지만 ‘온전히’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흐르는 보혈로 씻기지 않은 ‘종교적 지식, 지혜, 총명, 명철, 행위 등’은 ‘단지 배워서 익힌 인간의 계명’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런 ‘종교인’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물론, 늘 자기는 아니라고 말하죠.)
꼭 기억하십시오. 14절의 약속을 믿는 사람, 십자가 은혜를 아는 사람은 13절의 말씀 앞에 ‘네 제가 바로 그런 자입니다.’라며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의 ‘영적 엎드림’ 위에 ‘덮어 주시는 은혜, 손잡아 일으키시는 사랑’이 넘쳐흐르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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