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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8월 10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레위기 23장 1~14절



1. 오늘 본문인 ‘레위기 23장’을 시작으로 25장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가지 절기(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속죄일, 초막절, 안식년, 희년)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기에 대한 규례들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서로 보완되고, 반복되어 기록됩니다. 반복과 보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절기’에 대한 명령을 보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절기에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에 해야 할 것들에 대해 기록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말씀하신 ‘절기’가 종교행위를 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행위와 절차, 방법, 행사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면 또 다시 종교의 굴레에 빠집니다. 생명의 회복,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감격에서 출발한 기쁨과 사랑을 던져버리고 종교의 족쇄를 차게 됩니다.

2. ‘성회(聖會, holy convocation)’로 번역한 히브리어 ‘miqra qodesh’입니다. ‘miqra’는 ‘모임’ 또는 ‘소집, 읽기, 선포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qodesh’가 ‘거룩’입니다.

이 단어는 23장에서 11회가 등장합니다. ‘거룩한 모임의 날을 선포한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 중에서 중요하고, 큰 절기를 ‘miqra qodesh’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모임의 날’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나타난 이런 절기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절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2절의 기록처럼 ‘여호와의 절기들’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답은 3절에 있습니다. ‘안식’입니다. ‘쉼’입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3. 엄격히 따지면 무엇인가를 합니다. 8절을 보면 ‘화제(offering by fire)’를 드려야 합니다. 화제를 드리기 위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7절의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는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 땅의 것들을 채우기 위한 일(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일은 되고, 어떤 일은 안 된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일과 보통 이스라엘 백성의 일을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에 행하는 목회자의 일 또는 주일에 교회를 섬기기 위한 이런 저런 일의 허용 여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도록 말씀하신 절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절기를 완성하신 이 시대(신약의 시대, 은혜의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의 마음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라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혹은 ‘조직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각 사람에게 임하신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워진 것을 과대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부정 부패를 지적하면서 ‘무교회운동(Non-church movement)’로 흘러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무교회운동’에 대해 단편적인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교회운동’을 자기 이익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4. 여전히 교회에는 이런 저런 예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모든 예배와 교제를 ‘성회(거룩한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임과 예배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왜 이런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유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진정한 안식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참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동행하니까 내가 있는 곳이 교회이고, 내가 예배 드리는 장소가 교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의 자세로 삶을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 마음의 자세로 사는 것이 계속 유지가 되나요? 정말 무소부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변함없이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흔들림이 없으셨나요? (여러분의 대답은 각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저는 ‘아니요…’라고 답하겠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이유입니다. ‘아니요!’ 그렇습니다. 아니기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닌 이유는 여전히 남은 인간의 본성, 죄성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와 여러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5. 이것이 ‘성회’에 모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회’에 모여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화제’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금만 내버려두면 다시 본성에 휩쓸리는 나! 내 속에 죄성이 끌려 다니는 나!를 알면 스스로 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를 꽁꽁 묶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마음이 끌리는 것에 휩쓸리기에 ‘눈에 보이는 교회, 발 걸음을 옮겨 섬겨야 하는 교회, 내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정해진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절기를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인간이 행하는 종교 행위를 보며 기분 좋으시기 위해(이런 것도 참 이방종교스러운 표현입니다.)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막 나가는 인간, 대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 묶어 두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고, 말씀 묵상하고, 기도할 때마다 두가지 마음이 공존합니다. ‘이런 나는 십자가에 붙들어 놓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위기감’과 ‘이런 나를 십자가로 다시 부르시는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같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뉴저지주님의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함께 모여 서로를 섬기는 아름다운 교회, 진정한 교회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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