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야고보서 4장 1~12장
1. 오늘 본문의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세상과 벗하지 말라’입니다(4절). 세상의 것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 마귀와 싸움에 관하여서도 강하게 권면합니다(7절).
언제나 그렇듯 성경 속에 담긴 강한 메시지는 훈계, 질책, 권면 등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 간절함,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혼날까 두려워하는 마음, 저주받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생명의 축복, 영원한 진리 위에 든든히 서게 하시려는 십자가 사랑을 붙잡고 읽으십시오.
말씀 앞에 자기를 내려놓으십시오. 영혼 깊은 솔직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십자가가 앞에서마저 정직하지 못하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에서 지금까지 삶의 태도와 영혼의 자세를 돌이켜야 합니다.
2. 오늘 본문을 얼핏, 피상적으로 읽으면 ‘세상과 벗하게 하는 원인이 사탄 마귀’에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덜 아픕니다. 덜 찔립니다.
게다가 7절의 말씀을 행한다며(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까…), 고래 고래 소리지르며 사탄 마귀 쫓는 기도에 심취하면 뭔가 ‘종교적 카타르시스’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탄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탄 마귀가 어디를 전쟁터로, 싸움터로 삼는 지를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내면입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내 마음 속입니다. 1절입니다. 1절을 붙잡지 않고 읽으면 엉뚱한 곳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이 없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영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패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무기와 군사가 있어도 적이 없는 곳, 엉뚱한 곳에서 전투를 벌이면 바보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사탄 마귀는 세상의 것들로 너희를 유혹한다. 다른 곳이 아니라, 네 심령 속에서 너의 옛 습관, 옛 자아, 옛 모습, 옛 정욕을 끊임없이 도발하며 너의 심령을 전쟁터로 삼는다. 그렇게 여전히 너의 정욕과 자아의 충족을 위해 이 땅의 것들을 채우도록 만든다. 그것이 채워짐으로 잠시 누리는 자기 만족감에 취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너의 친구(벗)인 줄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너는 너의 진정한 생명이며, 참 친구(벗)인 나(예수님)를 버리게 만든다. 세상을 가까이하는 삶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실상은 나를 멀리한 삶, 나를 버린 삶을 살게 만든다.”
이것은 저의 요약이 아니라, 제 속에 울리는 성령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로마서 7장 18~25절’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피하고 싶은 말씀, 도망치고 싶은 말씀,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말씀이지만 다시 십자가에 저를 붙잡아 매고 기도하며 읽었습니다. (그렇게 로마서 8장 이후의 소망으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묵상하십시오.)
인정하십니까? 우리 인정하고 있습니까? 다른 곳이 전쟁터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전쟁터라는 것을 말입니다.
정욕의 샘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내 속을 들여다보면 소망이 없다는 사실에 고개 숙여 지십니까?
우리는 죽는 그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Glorification)의 날까지 내 속에서 두 마음(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Sanctification)의 삶입니다. 성화는 도덕적 세련됨으로 덫 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 흘리는 싸움입니다. 이런 나를 매일 십자가에 못 박는 참 생명을 향한 처절한 전투입니다.
5. 세상의 것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자극 당하는 내 속의 악한 마음, 교묘한 마음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다시 성령의 법을 거스르려는 육체의 법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내 안에서 갈등하는 ‘두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앞에 그 누구도 ‘나는 아니다.’ 혹은 ‘나는 좀 낫다.’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든다면 이미 마귀에게 속은 겁니다.)
세상과 벗하려는 ‘간음한 여인’은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입니다. 원문은 ‘간음한 사람들아’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는 ‘간음’은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벗하려는 모든 것’이 ‘두 마음, 간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채워질 때 잠깐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즐거움이 되야 합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9~10절을 이런 마음으로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우울증 걸리게 하시려고 ‘울음, 애통, 근심’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높은 자리에 올리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범죄한 내 자아에 대한 ‘절대 절망’이 십자가의 ‘절대 소망’으로 바뀌도록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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