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4장 14~5장 10절
1.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안식(구원)에 대한 설명(3장7~4장 13절)에 이어 다시(2장 17절에서 잠깐 ‘대제사장’을 언급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는 키워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라는 설명을 이어갑니다.
14~16절은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짧지만, 정확하게 서술한 내용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을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는 것, 16절)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5장 1~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대속의 은혜가 완성되기 전에 대제사장 직분을 감당한 사람 대제사장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전히 죄인이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택하심(4절)’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직분을 완성하기 전까지 허락된 인간 대제사장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5장 5~10절은 레위인의 혈통(오직 레위인, 그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만이 대제사장이 되는) 또는 종교적 정통성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한 선포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 (창세기 14장 17~20절)에 따라 ‘멜기세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2. ‘멜기세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멜시세덱’을 보면서 “누가 ‘멜기세덱’인가?”에 초점을 맞추면 낭패를 봅니다. 한국의 유명(?) 이단(異端, heresy) 중에 자신들의 교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다(10절)’라는 는 식으로 억지 해석을 끼워 맞추는 이단이 있습니다.
“누가 ‘멜기세덱’인가?”가 아니라, “왜, ‘멜기세덱’을 언급하는가?”가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해서 내일 다시 다루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제사장’입니다. 직분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정체성입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근본적 이해입니다.
대제사장은 종교 행사를 집례하는 최고의 자리가 아닙니다.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에봇)을 입고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3. 대제사장은 한마디로 ‘죽은 자’입니다. ‘죽었으나, 하나님의 살리심을 받은 자’입니다. 대제사장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우와 대단하다. 저 화려한 옷을 입은 택함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식의 생각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자이다. 죄의 결과인 죽음, 그러나 대신 죽은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간 존재,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라는 영혼의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높은(?) 목사, 큰(?) 목사, 담임목사 따위를 ‘대제사장’이라는 식으로 착각하면 큰 일 납니다.
‘대신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대신 죽을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4장 18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5장 5절)만이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습니다.
4. 히브리서는 유대인, 그 중에서도 제사장이 아니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말 그대로 ‘히브리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과 구약의 제사 속에 담긴 ‘죄인인 나 대신 죽는 존재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연결됨, 그 은혜의 보좌(지성소)로 나아가는 것(16절)에 대한 깊은 영적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순서가 앞뒤로 바뀌었을 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진정한 대제사장 직분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알게 됩니다.
5. 마지막으로 15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마음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히브리서의 기록자(전통적으로 ‘사도 바울’)는 15절을 ‘이중부정문’으로 기록함으로 이 부분을 아주 강조합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우리의 부족함, 모자람, 죄성 등으로 인해 겪고 있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시는 예수님! 아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그것들을 겪으시고,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15절을 통해 선포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5절의 “동정”이라는 번역은 자칫 오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서 출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아이고, 불쌍해라. 안 됐다.”가 아닙니다.
헬라어 ‘sumpatheo’는 ‘같은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의 위치입니다.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아프고 어려움을 직접 겪으신 오히려 ‘더 낮은 마음’입니다(빌립보서 2장 5~8절).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체휼(體恤)’이라는 어려운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속에 담긴 뜻(몸으로 직접 겪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까웠습니다.
진짜 ‘이런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진정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누군가를 향해 “쯧쯧”하며 혀를 차는 동정심 섞인 교묘한 우월감에 취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혼의 태도가 ‘긍휼하심을 받은 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은 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도 내 생각과 마음의 상태를 십자가 앞에서 점검하며, 납작 엎드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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