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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7월 28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시편 88편 1~18절



1. 고라 자손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시편이 이어집니다.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을 지나는 시인의 두려움과 고통을 기록했습니다.

시편 88편의 내용을 읽어보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절망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잘 된다’라는 틀에 박힌 신앙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 생활과 거리가 멉니다. ‘이럴 바엔 굳이 믿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시편입니다.

그러나, 이때 진짜가 드러납니다. 시편 88편에 기록된 영혼의 고름 같은 신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 너머에 흐르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2. 시편 88편에 기록된 아픔, 고통, 절망의 상황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이 겪은 일들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온갖 수식어를 쓰며 뒤집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괴로움을 묵상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 더 괴로운가? 누가 누가 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고통경연대회(?)’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고통의 문제는 사람 사이에서 해결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입니다. ‘저 사람보다 더 괴롭고, 저 사람보다 덜 괴롭다’는 것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그 문제의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원인이 보일 때, 다시 십자가 붙들고 돌이키면 됩니다. 일어서 오늘 허락된 생명의 길, 지금 열려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정말이지 그런 분들을 봅니다. 상황의 어떠함에 묶이지 않고, 지난 일에 발목 잡히지 않고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 지금 내 앞에 있는 믿음의 길, 십자가 능력의 길을 한 걸음 걷는 분들을 봅니다.

오늘 저녁 내 육신의 생명이 끝날지라도 지금 십자가 앞에서 돌이키는 생명의 결단을 하며 사시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고백과 삶의 걸음을 지켜볼 때, 저도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믿음의 길, 십자가 그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3. 시편 88편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시인의 상황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시인의 고백 속에는 ‘부르짖었더니 해결되었더라’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여전히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허공에 메아리’처럼 기도가 떠도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의심(?)하는 것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10~14절을 보면 온통 의문투성이 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조롱하는 듯한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1~2절 때문에 그 이후의 고백이 불신앙의 불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솔직한 표현입니다. 거친 듯하지만, 있는 그대로 쏟아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의 표현이 괴로움 가득한 탄식이라도 그 중심을 아십니다. 내 속의 상태를 아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아십니다.

반대로 기도의 표현, 그 말이 아무리 수려해도 아십니다. 그 표현이 흐르는 꿀 같아도 다 보고 계십니다. 아무리 입술로 ‘부족하다. 죄인이다.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표현해도 그 마음의 상태를 뚜렷이 보고 계십니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것이 나의 외적인 상황 변화를 꾀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정말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것이 나의 내면을 향한다는 것을 알고, 그 전능하신 능력 앞에 엎드려 나를 바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고, 모든 문제 해결의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달라진 외적인 상황 변화는 오히려 나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잘하는 줄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 앞에서 그 문제의 해결과 상황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보이는 상황의 변화’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 마귀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시적이며 통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변화! 여전히 육체의 시각, 자아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범죄한 내가 죽는 것은 십자가 은혜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 상황과 문제를 바라보는 내 생각과 판단이 (제발!)틀리기를 기도하는 것’은 십자가 은혜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의 고백이 참 다가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라는 고백 속에 감춰진 믿음이 보입니다.

“네,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는 무덤과 멸망의 상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소망을 붙듭니다!”라는 감춰진 보석보다 더 귀한 믿음이 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고백에 합당한 믿음의 결단! 그 결단을 통한 믿음의 열매가 맺히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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