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44장 21~45장 7절
1.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의 강대국은 ‘앗수르 제국’이었습니다. 남유다 역시 ‘앗수르’에게 호되게 당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극적인 간섭과 개입으로 간신히 멸망을 피합니다. (열왕기하 18~19장)
이 절체절명의 시기 전후에 ‘이사야서’가 기록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기며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꾸역꾸역 스스로 멸망길을 가지 말고, 바벨론 포로 70년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둥의 말을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말씀이 들릴 때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회개가 아니라, 오늘의 회개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남유다 상황, 그 당시 ‘이스라엘 주변국(고대근동지역)’의 상황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힘센 신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 부유함은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으로 이어지는 제국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에 기록된 내용들은 믿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 딱 좋은 내용입니다. “여호와라는 신(神)은 자기 백성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무슨 창조주라고 말하느냐? 그런 신을 믿는 너희도 참 딱하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추앙하지 않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도 애 둘러 사용한 것일 뿐, 날 것으로 표현한다면 ‘재물, 돈’입니다. 모든 것의 선택, 판단 기준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느냐, 아니냐’ 뿐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3. 하지만, 이 때가 진짜 믿음, 신앙이 증명되는 때입니다. 인간이 육체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그것! 그것을 주는 존재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선택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성경 말씀의 가치’를 붙들고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믿음과 신앙의 증거입니다.
힘든 것 압니다. 너무 외로운 것도 압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독하다 못해 허무함이 밀려오기도 한다는 것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의 이런저런 축복(?)을 보며 ‘나는 잘 못 믿는 것인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이라는 북 받이는 감정이 올라는 것도 압니다. 저도 같은 고민, 같은 생각하며 심령의 깊은 한숨을 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다시 제 눈 앞에 하나님 말씀을 펼치는 제 자신, 심령의 깊은 골을 말씀으로 메우게 하시는 은혜, 기도 가운데 영혼을 세우시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오늘 말씀 첫 구절(21절)부터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곱씹어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절절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애끊는 부르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 이런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영광(23절)’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救贖, Redemption)의 은혜’입니다. 죄악의 값인 죽음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구원하시는 은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영광’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영광’을 인간의 언어적 개념, 오염된 사고체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6. 오늘 본문에 나온 ‘고레스(Cyrus)’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위대한 페르시아의 황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 조차 함정입니다. 쓰임 받은 존재라고 해서 ‘대속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만약, ‘고레스’가 ‘나를 황제 만들어준 저기 이스라엘 변방의 ‘여호와’라는 신을 섬기도록 내가 허락해주겠다.’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냥 거기서 끝입니다.
말 그대로 도구로 쓰임 받았으나 정작 자신의 영혼은 버림 받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여호와’라는 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영혼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일 뿐입니다.
나름 많은 사람들이 ‘교회도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예배, 기도, 찬양이라라고 불리는 종교적 행위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가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떳떳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21~22절의 부르심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 부르심을 붙들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 외에 대답이 없습니다.
오늘도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았다. 나에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라는 음성에 이끌리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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