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야고보서 1장 1~11절
1. ‘야고보서’의 기록자 ‘야고보’는 구약성경의 ‘야곱’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몇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동생이면서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본 서신의 기록자라는 것이 가장 정통성 있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가장 믿지 못했던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1~6절은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2. 어릴 때부터 봤던 내 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구원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정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유월절 어린 양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야고보 역시 당시 수많은 혈통적, 종교적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의 태도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속에 나타난 대속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기 보다 그냥 문화, 종교, 상식(?)의 일부로 유대교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옆에서 그렇게 사니까 그냥 살았습니다. 보이는 율법은 그럭저럭 지켰지만, 영혼은 종교심, 자기 의로움, 자아의 간사함 등으로 회 칠 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부딪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녹았고, 성령의 능력에 이끌린 바 된 것입니다.
3. 따라서, ‘야고보서’ 역시 과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한 반성문에 가깝습니다. 특히, 12지파… 자신과 같은…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죄인인 나 대신 드려진 제물(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뭔가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그런 식의 종교적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종교적 신념이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그냥 자기 욕심에 근거한 고집입니다.)
3절의 “믿음의 시련”이 왜, ‘시련’이겠습니까? 믿음에 왜 시련과 인내가 필요하겠습니까? 흔히 별 생각 없이 말하는, 상투적으로 말하는 ‘믿는 사람에게 시련이 온다’이런 식입니까?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려면 인내해야 된다.’이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식의 표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이런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라는 진리가 범죄한 나, 절대로 죽지 않으려는 나 자신의 내면에 들어오니 우리 안에서 갈등, 고민, 아픔, 괴로움, 시련!!!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련’으로 번역된 ‘dokimion’은 ‘증명’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우리 남은 인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며,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무엇 무엇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수준에 머문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로 판명(dokimion)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거짓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나의 모든 껍데기와 죄악이 불타버릴 때 허망함만 남을 것입니다.
‘dokimion’이 사용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네, 여기서 “확실함”이 ‘dokimion’입니다.
5. 저와 여러분이 믿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핵심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것이 전부이어야 합니다.
5절의 “지혜”도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역설로 이루신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지혜와 지식으로 살려니 의심이 생기고, 불안한 것입니다. 두 마음으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5~8절)
그런 마음으로 9~11절을 대하면 도덕심 혹은 ‘이렇게 살면 더 큰 축복 주시겠지…’라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할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그래야 소망이 있다.’는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이런 마음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안에 나 대신 예수님 사시는 ‘dokimion(증명)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런 ‘믿음의 dokimion(증명)’이 넘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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