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9장 11~22절
1. 오늘 본문 11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그러나’로 번역할 수 있는 접속사(de)가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옛 언약의 대제사장(인간 대제사장)이 했던 일(사역, 역할…)’과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대조하여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1~1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대속의 제물 되심)의 영적 가치를 설명한 것입니다.
15~22절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심(완전한 제물로 드려지심)’ 새롭게 세워진 ‘새 언약, 그 언약의 중보자(仲保者, 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온전히 감당하시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을 연결하는 ‘진정한,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참고로 ‘중보자’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드립니다. ‘중보자’로 번역된 헬라어 ‘mesites’는 ‘가운데, 중앙’의 뜻을 가진 ‘meso’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을 해결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갈등을 조정해준 다음 양쪽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협약을 보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은 위에서 말하는 정도의 ‘중보’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양쪽이 적대의 관계가 된 원인을 직접 해결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내가 원수되게 한 원인인 ‘죄’를 십자가에서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대신 갚으셨습니다.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심(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새 언약’에 도장(?)이 찍힌 것입니다. 십자가의 언약이 완성된 것입니다.
2.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이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것에서 그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할수록 그 깊이와 은혜가 더해가야 합니다. 더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응, 십자가… 그래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가 구원받았지. 나는 그거 믿어.”라는 식에서 머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단번 영원 속죄(12절)’를 ‘간단한 종교적 이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쉽게, 쉽다 못해 편리한 수준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식의 ‘인스턴트 구원관’이 너무 깊이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남은 신앙의 삶, 그 여정은 우리도 모르게 자리잡은 ‘쉽고 편리한 구원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행위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윤리와 도덕에 치우친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무시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이런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매일 매순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금만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 붙잡고 펄펄 살아 뛰는 자아!’ 또한 ‘여전히 자아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으로 포장된 땅의 축복을 움켜쥐려는 나!’를 ‘단번 영원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3. 너무 많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이 ‘단번 영원 속죄’를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과거) 한번으로 끝나는 ‘종교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단번 영원 속죄’의 진리를 붙잡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을 잊습니다.
다시 ‘동물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믿고, 매일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쉽게 구원을 받으려는 또 다른 인간의 간사함에 속았습니다. 전하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모두 인간의 간사함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단번 영원 속죄’ 다른 표현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진리’는 일회성에 그치는 ‘주입식 종교 교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내가 붙들 생명입니다!
목에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매일, 매순간 숨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한순간도 ‘십자가의 진리’를 놓칠 수 없습니다.
4. 십자가, 그 피 흘려 주심의 가치를 죽어도 붙들어야 합니다. ‘죽어도…’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것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대속의 은혜, ‘처음 장막(모세의 장막)’을 통해 열어놓은 ‘생명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물론, 걷는다고 말은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맘대로 만든 길, 사람 생각이 섞인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온전하고, 완전하고, 은혜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
‘피 흘려 주심의 가치’가 종교 교리가 되지 않도록, 피 흘리기까지 이런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묵상하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과 능력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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