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9장 1~10절
1. 어제 읽으신 본문(8장 3~13절)에서는 기존의 대제사장(인간 대제사장)과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 속에는 크게 세가지 핵심 요소가 있었습니다. ‘제사 때 드려지는 예물(제물), 제사를 드리는 장소(장막),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과 더불어 맺은 새 언약’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세가지 중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장소,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성소, 장막, tabernacle)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짧지만, 함축적으로 ‘첫번째 장막(모세의 장막)’에 대해 1~5절에서 설명합니다.
참고로 5절 하반절에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현존하지 않는다고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영화의 소재처럼…)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렇게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6~7절을 통해 다시 ‘대제사장’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7절의 “둘째 장막”은 ‘성소(聖所, the holy place)’ 안에 있는 ‘지성소(至聖所, the holy of holies)’를 의미합니다(3절).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해 드리는 피 없이는…”입니다. 대신 죽은 제물의 피로 가려지고 씻은 바 되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대속의 은혜를 완전히 이루신 보혈과 연결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히브리서의 기록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7절에서 강조합니다.
그렇게 10장 1~20절 통해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7절 한 절을 10장 1~20절에서 확장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대신 흘린 피’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는 구원의 진리를 10장까지 점점 발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이 마침내 “그렇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구나”라는 믿음의 고백이 터지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3. 이런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교인도 아닌데, 인간 대제사장의 역할 혹은 성막의 구조, 구약성경에 기록된 제사의 방법 등등을 꼭 알아야 할까?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전 것(각자의 구원관)과 새로운 것(십자가를 통한 구원)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각자가 생각하는 구원(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원(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 문화, 교육, 생활 방식 등등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다른 의미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땅의 삶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가 겪어온 현실의 삶은 다양합니다. 어렴풋하지만 죽은 이후에 펼쳐질 어떤 것도 다양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기 생각(인간 죄성과 본성)에 기초한 구원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슬며시 섞어서 이해합니다.
그래서 깨뜨려야 합니다. 깨져야 합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순전한 구원과 진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오늘도 덕지덕지 붙는 인간의 생각을 매일 매일 떨쳐내고, 씻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걸어야 할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발걸음입니다.
기독 윤리와 도덕의 실천을 위한 ‘성화’가 아닙니다. 이런 내가 매일 십자가에 죽은 결과! 그렇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결과가 ‘성화’입니다.
4. 좀 둘러간 것 같지만, 유대인들(모든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는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길고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삶의 지혜, 요령 등’을 터득(?)하는 것일까요? “구원은 이미 따 놓은 것이고… 이제 남은 땅의 삶을 어떻게 하면 축복받아서 풍요롭게 살 것인가? 내가 받은 신앙의 요령(?)을 어떻게 하면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등”을 고민(?)고 그 고민에 맞게 뭔가 종교행위 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신앙생활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생각이 ‘이전 생각’입니다. 십자가와 자기 생각이 뒤섞인 ‘오염된 구원관’입니다.
우리 단순(?) 해져야 합니다. 바보 같다고 싶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하는 것이 순전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 앞에 순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그럴 수 없는 내 자신의 간사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의 간사함과 악함 때문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어떠함을 살필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고 싶어 더 엎드립니다. 십자가에 이런 내 자아가 죽는 것! 그렇게 못 박혀 붙들린 것 외에 소망이 없다는 절박함이 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신앙 생활할수록 세상을 즐기지 못한 미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알지 못한 미련(?)이 더하길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긍정적 미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바꿀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감각으로 표현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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