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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7월 14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이사야 41장 1~20절


1. 회복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점점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간의 죄성과 악함보다 강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버리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1~2절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모든 권세,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깨뜨리시며, 불 태우실 것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는 시점에서는 ‘앗수르 제국’에 대한 심판입니다. 가까운 미래적 시점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멸망입니다. 그렇게 모든 시대의 강대국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그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궁극의 악한 세력이 반드시 무너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5~7절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저항하는 이방 민족들의 연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도 여전히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더 단단히 붙잡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2. 이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이상한 복수심 같은 것이 마음에서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일명, ‘하나님의 갚아주심’입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은 이스라엘 혹은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길 원하십니다. 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길 원하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함으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모든 여정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은 ‘구원하시고, 살리시고, 생명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어야 합니다.


3. 그런데, 가끔 8~13절(그 중에서도 11~12절)을 보면서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나 대신 복수(?)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거기다 15~16절을 더하여 정신적 흥분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과연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위에 말씀드린 정도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밑도 끝도 없는 종교적 자부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특권’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세상의 독소가 빠져야 합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특권이기에 특권마저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 실존의 어떠함을 깊이 인식하고, 십자가의 어떠함을 붙든 사람은 ‘구원의 특권’이 내게 임하였지만, 그 특권에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낮아지게 됩니다.


4. 오늘 본문을 읽으며 14절에 마음이 가야 합니다. 14절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에서 영혼의 시선이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17절의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라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7절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사야 55장 1~5’절에서 다시 재현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선포하십니다.

그렇게 ‘요한복음 7장 37~38절’로 연결됩니다. 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 영혼의 갈증으로 죽어가는 ‘가련하고 가난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생명수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서 종결됩니다.


5. 저와 여러분에게 ‘가련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네 주님’이라는 철저한 자기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질문해 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있습니까? 없다면, 왜 없습니까? 한번 더 질문해 봅니다. 우리의 가련하고, 가난한 마음은 지금 내 상황과 형편 때문 아닐까요? 우리 안에 가난하고 가련한 마음이 없는 것도 내 상황과 형편 때문 아닐까요?

우리의 심령은 십자가 앞에서 마음이 낮아지다 못해 앙상하게 남은 가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작은 성령의 바람에도 벌벌 떠는 영적 민감함, 영적 가녀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버러지 같은 너, 민철아. 너에겐 여전히 가련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참 생명수인 나 예수의 은혜만을 구하는 마음이 있느냐?”라는 영혼의 음성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네 주님, 버러지 같은 저는 예수님의 은혜 없으면 안 됩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뒤틀린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지심이 아니라,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 저의 본성, 죄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누구보다 교만하고, 악한 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이런 저에게 끊임없이 14절과 17절의 음성을 들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함께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 십자가 끝까지 붙들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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