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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7월 14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이사야 41장 21~29절


1. 세상의 것을 통해 자아의 충족과 만족을 추구하던 남유다(북이스라엘)는 이방민족의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싫어 버리고, 우상들을 따라갔습니다.

물론, 자신들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 껍데기는 위대한 솔로몬이 지어서 봉헌한 것이기에 성전 속에 함께 섬기는 각종 우상들은 크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일단, 난 ‘건물 교회’에 나와서 종교 예식인 예배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고 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 드림’과 ‘예배 봄’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단어만 ‘예배 드림’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때마다 제물의 각을 떠 번제단에 올리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패역한 내 자아, 그 중심을 십자가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2.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회복은 이런 ‘믿음의 회복’에서 출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다시 붙들고 ‘내가 죽은 그 자리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임한다.’는 믿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각 종 우상으로 표현되는 사탄 마귀의 계략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대속 은혜만 붙들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가장 고상한 종교 생활도 보장한다. 너의 눈과 육체에 즐거운 축복을 다 줄 수 있다.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주겠다.”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단순한 종교적 상징, 고난 받음의 대명사로 위장하여 네 속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종교 생활의 의로움’으로 포장하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그 고난 가운데서도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고독한 의인으로 추앙 받도록 해줄 수 있다.”라며 속입니다.

이런 사탄 마귀의 속임수에 반응하는 우리 육체의 간사함, 내 생각의 간악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또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요구됩니다.


3.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적 고뇌’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상’이라고 하면 ‘타종교, 세상의 것’ 등으로 바로 넘어가 버립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거짓된 우상의 실체, 허망한 우상의 실체를 고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반사적으로 ‘바벨론의 우상’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세상의 축복을 줄 것 같았던 바벨론의 우상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신다. 가장 강력했던 바벨론의 우상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시고, 유다 백성들 해방하셨다. 70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다.”라는 기계적 사고와 묵상에 머물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혹’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유혹에 넘어간 내가 문제입니다. 유혹이라는 달콤함을 삼켜버린 내 영혼의 목구멍이 문제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을 영혼의 먹이로 살아가는 죄악된 본성이 문제입니다.

4. 오늘 본문 25절의 “한 사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는 한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Cyrus)’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에스라 1장 3절)라고 말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 그 속에 담긴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종교적 관념에서 “이스라엘의 여호와라는 신(神,god)도 내가 황제 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까 그 여호와를 섬기는 성전 건축을 허락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레스’라는 한 범죄한 인간의 구원과 상관없이 ‘딱, 고레스 수준’에서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쓰임?받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자기가 크게 쓰임 받는다는 스스로의 착각에 속아서 십자가를 놓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저도 오늘 십자가를 택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5. 저는 오늘 본문 29절을 보면서 ‘공허한 바람 같은 우상’이 실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제 중심에 올린 ‘자아의 돛’이라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아의 돛’에 ‘우상의 유혹, 그 바람’이 부딪히면 내 삶의 배가 요동칩니다. 요동치다 못해 내 영혼의 배가 파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의 돛’을 내립니다. 오늘 아침 저도 모르게 올린 ‘자아의 돛’을 다시 내립니다. (좀 과격한 표현으로 돛대를 부숴 버리고 싶습니다.)

‘자아의 돛’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허망한 바람, 위험한 바람’의 인도를 받기보다 ‘십자가 생명수의 흐름’에 맡기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바람처럼 제 피부로 느낄 수 없고, 기분을 좋게 하지 못하고, 돛대의 펄럭임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묵묵히 흐르는 ‘십자가의 보혈, 그 생명의 흐름’에 제 영혼, 전인격, 인생을 맡기기 위해서 매일 ‘자아의 돛’을 내립니다.

세상의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자아의 돛’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인도함을 따라 깊은 영혼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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