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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7월 13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이사야 40장 12~31절

1.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어제부터 ‘이사야서(40장부터)’를 묵상합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9장은 심판에 대한 내용이라면, 40장부터는 회복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암기(혹은 이해)했습니다.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된 구약성경 39권(이사야 1~39장), ‘오신 메시야’에 대한 기록인 신약성경27권(40~66장)을 연상시켰습니다.

2. 특히 40장의 전반부(어제 본문), 그 중에서 1~5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 위로, 평안의 선포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 고난, 공포, 불안 등에 시달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을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야, 첫 곡(No.1 comfort ye, comfort ye My people)의 가사,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곡의 가사로 ‘이사야 40장 1~3절’이 사용되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마음으로 이 곡을 들어보십시오. 죄악에 빠져 고통 당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정말 잘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오늘 제가 나누는 묵상은 감성적인 부분을 부각시켜서 나누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무딘 마음, 굳은 마음, 딱딱한 마음, 익숙한 마음 때문입니다.

감격과 감동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감성에 치우친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감성의 영역이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감성은 우리의 굳은 심령의 껍질을 벗기는 성령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악이 씻겨 나간 은혜, 성령 하나님의 끊임없는 권면과 이끌어 주시는 사랑이 익숙하다 못해 흔하게 느껴진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예민하게 느껴야 합니다. 영적 민감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하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거칠고 무딘 영혼을 깎아내는 ‘영혼의 대패’라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4. 앞으로 ‘이사야서’는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이런 것이 예언서들의 특징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만큼 영혼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이 딱딱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익숙함과 당연함은 종교적 특권의식에 빠지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다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본문의 내용, 즉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택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 그 속에 담긴 참 의미를 놓쳤습니다. 가장 연약한 우리, 원래 우상숭배하던 우리를 택하여 ‘언약 안에 있는 대속의 은혜’를 붙들게 하신 ‘선택’의 참 의미는 버리고, 알량한 종교적 특권의식에 빠졌습니다.


5. 그러니, 솔로몬의 눈에 보이는 축복을 따라갔습니다. 주변 국가의 화려함과 강대함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보이고, 붙잡히는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의 우상에게 마음이 쏠렸습니다.

진정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습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말해도 그 길을 꾸역꾸역 걸어갔습니다. (이런 그들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이사야 40장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무엇 때문에 그렇게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29절의 ‘피곤함’은 무엇 때문에 온 것입니까? 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찾아온 ‘피곤함’입니다.

‘피곤함, 곤비함 등’을 너무 오해했습니다. 이런 말씀 보면서 마치, 피로회복제처럼 적용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열심히 일할 때 찾아오는 피곤함 등을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극복하기 위한 구호로 사용했습니다. 거기에 살짝 ‘종교적 사명, 하나님께 쓰임 받음’을 더하면 29~31절은 기가 막힌 ‘정신적 카페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독수리가 날개 칠 때, 보이지 않는 공기의 저항이 필요합니다. 달음박질할 때 바닥을 디뎌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범죄함에 발 묶인 내 영혼이 날개 치듯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딛고 서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반석, 진정한 안식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딛고 일어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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