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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9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잠언 21장 1~14절


1. 잠언 21장입니다. 괜한 걱정을 해보았습니다. 반복되는 잠언의 특징 때문에 ‘본 거네. 아는 내용인데.’라며 저도 모르게 슬쩍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말씀 속에도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당연하지’라는 생각이 솟구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기독교인이 있을까?’라는 마음도 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알지만,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읽는 순간에는 그렇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보는 순간에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 때 뿐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드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 거만함에서 떠나라. 등등’을 읽고, 듣고, 말해도 그냥 그 순간 조금 감동하는 척하고 끝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있고, 하고 싶은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어쩌면,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치 면죄부를 받는 것처럼 행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기록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 인도하는 모든 행위가 ‘제가 하고 싶은 어떤 것들을 이루고, 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두려움이 가장 큽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니 나는 안 그럴 것이다.’라는 착각을 할까 무섭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말하는 것조차 고도로 훈련된 종교적 습관일까 겁납니다. 그래서 또 산으로 갑니다. 골고다 그 언덕의 십자가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갑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그것이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2. 말씀에 못박힌 저의 묵상을 나누기 전에 이렇게 길게 고백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반복으로 인한 익숙함, 교묘함’에 속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1절은 ‘왕(솔로몬 포함, 모든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도자(목회자 등)’에게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높고 위대한 자리에 오른 사람,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거절할 수 없는 십자가 은혜’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더 크고 굵은 못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봇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peleg myim’을 직역하면 ‘강물’입니다. 그냥 강물이 아닙니다. 거대한 강물입니다. 대속의 은혜 안에 흐르는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강물, 영적 물줄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왕입니까? 어떤 사람이 지도자입니까?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적 물줄기에 쓸려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대속의 은혜에 내 자아가 쓸려 내려간 사람입니다. 십자가 보혈에 나의 죄악과 본성이 다 떠내려간 사람입니다.

3. 이런 마음으로 1절부터 차근차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잠시 제가 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글을 대하는 걸 멈추시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14절까지 보셨습니까?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말씀 속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하셨습니까? 내 안에 어떤 것들이 쓸려내려 가야하는 지 보이십니까? (단 하나도 피할 수 없었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14절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답은 1절에 있습니다. 1절이 바로 이해되면, 14절이 조금씩 보입니다. ‘은밀한 선물, 품 안의 뇌물’이 무엇이겠습니까? 힌트를 드립니다. ‘흐르는 거대한 강물에 씻어야 할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에 떠내려 보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네, 저와 여러분의 은밀한 본성, 숨겨진 죄악, 감추고 싶은 그것들입니다!!!

(“선물”로 번역된 ‘mattan’은 ‘속죄의 제사에 드려진 제물(offering)’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은밀한”으로 번역된 ‘cether’는 ‘숨겨진, 가려진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숨겨진 죄악’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악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4. 갑자기 ‘힌두교’하면 유명한 ‘갠지스강’이 떠오릅니다. 강물에 씻고, 떠내려 보냄으로 더 좋은 곳으로 가려는 인간의 종교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범죄한 인간,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궁극의 두려움에 휩싸인 인간의 몸부림입니다.

저는 그렇게 종교적으로 발버둥 치는 그들을 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열심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종교공식 같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忿怒anger)‘는 단순하게 ‘화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 안타까운 심정, 흐르는 눈물’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네 속의 숨겨진 것들을 감추기 위해 엉뚱한 것으로 덮지 말아라. 숨기려는 그것들을 나의 보혈로 덮어 내 앞에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강물(봇물)같은 십자가로 초청하시는 은혜에 쓸려내려 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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