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6장 1~11절
1.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내에서 일어난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 고발하는 것에 대한 권면입니다. 고대 로마사회는 21세기의 미국과 비교할 수 없지만, 법과 제도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습니다.
이런 ‘법과 제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누군가 ‘법과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나를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 지도층, 엘리트 등은 경쟁자를 제압하거나,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주 소송(송사)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법을 이용한 ‘모함’이 흔했다고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정당한 손해에 대해 ‘일반법정’에 호소한 것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작은 실수, 상대방이 나에게 가한 작은 불이익(충분히 용서 혹은 면제 가능한 것)’을 빌미 삼아서 ‘고소, 고발’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마음(모함, 시기, 질투 등)으로 상대방을 제압,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1절 속에는 “너의 ‘교묘한, 간사한, 악한 마음’을 봐라. 고발하는 네가 더 ‘불의한 사람’이면서 ‘불의한 세상 사람’에게 고발하느냐?!”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2~7절에서 질책은 계속됩니다. 의문문입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 정말 모르냐?!”라는 강한 질타입니다.
이 속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에는) 세상이, 심지어 천사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는 더 악한 마음으로 ‘세상 법정’에서 판단 받으려 하느냐? 게다가 그런 것은 ‘작은 일, 얼마든지 너희 안에서 해결 가능한 일 아니냐?(2~3, 6절)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너희 중에 그런 문제 하나 해결할 사람이 없느냐?(5절)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않느냐?(5절) ”라는 사도 바울의 한탄, 탄식에 대한 강한 표현입니다.
9~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감정을 좀 추스른 듯 권면을 이어갑니다. “불의한 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잊고, 자기 의로움을 위해 고소 고발을 일삼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제시합니다. (9절 상반절)
그렇게 ‘정당한 손해에 대한 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모함과 질투로 세상 법정’에 고소, 고발하는 것 역시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등’과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9절 하반절~10절)
3. 그렇게 11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실, “참 악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름 부드럽게 표현했습니다.)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고,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내 생각, 이익, 자존심 등’에 걸리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때 그때 다릅니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상대방에 따라 다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실수, 잘못 등’을 나의 상태, 상황, 감정, 이권의 어떠함에 따라 혹독하게 또는 너그럽게 다룹니다.
이런 ‘인간(나)의 악함, 간사함, 매정함’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갑니다. 그 보혈에 내 마음을 씻습니다. 내 생각의 어떠함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일을 대하는 ‘나의 날카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너그러움’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임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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