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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3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잠언 18장 1~12절


1. 잠언을 통해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진리이며, 내가 살 수 있는 길,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따라 내 심령 깊은 곳, 덮어두고 감춰둔 그 끝까지 성령의 빛이 비추길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대청소를 위해 몸부림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합니다. 아프고, 괴롭고,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대는 것입니다.


2. 잠언은 구체적으로 우리 삶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삶의 결과, 하나님을 자아 충족과 만족을 위해 이용하는 종교생활의 결과를 지적합니다. 반복적으로 지적합니다. 그만큼 질기기 때문입니다. 잘라낸 것 같았지만, 또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솔로몬의 고뇌를 조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혜롭다는 생각으로 참 많은 말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라고 생각하며 많은 판단, 평가, 추정, 짐작, 예상 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다행스럽게도 맞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1~8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그의 한탄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말이 아니라, 차라리 적었어야 했는데… 머리에 번뜩 떠오른 생각을 담을 수 없는 말로 쏟아 내기 보다 지금처럼 적었어야 했는데… 차근 차근 내 마음판에 새기며 적었어야 했는데…”라는 마음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언의 기록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3. 많은 종교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자꾸 초자연적 현상에 치중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물론, 온 우주에 성령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우리 안에서 우리 심령을 비추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십니다. 나를 보게 하십니다. 나를 예수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면 다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 고집, 자기 의사(속사람의 아집)만 내세우던 사람이 변합니다.

‘명철(understanding)’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명철’은 똑똑함이 아닙니다. ‘명철’로 번역된 ‘tabunah’은 ‘이해’를 말합니다.

잘 아시 듯 ‘이해(understanding)’는 ‘그 대상 아래에 서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인격적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이것입니다. ‘범죄한 저와 여러분 아래에 처하신 것’입니다.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영혼 밑바닥에 서신 것’입니다.


4. 저와 여러분이 정말 십자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복음에 부딪힌 사람이라면, 삶의 태도와 말, 눈빛, 표정 등이 어떠해야 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실수로라도 튀어나온 본성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자기를 쥐어박고 싶어 집니다. (저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혼자 한숨을 쉬고, 입술을 때릴 때도 있습니다.)

솔로몬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 뛰어난 머리, 언변, 논리, 웅변 실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을 것입니다. (수사학적 언변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상대방을 찍소리 못하게 하는 것, 비아냥 거리 듯 슬쩍 돌려서 공격하는 화술입니다.) 그런 솔로몬도 결국은 7~8절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명철, understanding)이 없는 말은 ‘미련한 자의 입술’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영혼의 그물’이 되었다. 사실, 그 달콤함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죄성을 자극하는 그런 말들이 아닌 줄 알면서도 ‘별식’처럼 즐겼다. 그것이 내 영혼 깊은 곳을 병들게 하는 줄도 모르고…”라는 고백이 1~8절입니다.


5. 몇 차례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잠언을 지혜 모음집으로 생각하며 한 절씩 파편적으로 보면 오해를 하기 딱 좋다고 말입니다.

잠언은 솔로몬의 반성문(?)에 가깝습니다. 그가 지식을 자랑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지혜를 받아 놓고 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발,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부끄럽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에 기댄 절절한 고백입니다.

그 마음으로 10~12절은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절대 11절을 따로 보면 정말 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다르게 보이십니까? 제가 기록한 것을 읽으시기 전에 마음으로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부유함의 대명사였던 솔로몬이 결국은 무엇을 의지했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여호와의 이름! 나(솔로몬) 같은 죄인에게 언약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언약의 하나님)’를 ‘견고한 망대, 견고한 성’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재물’을 ‘견고한 성, 높은 성벽’으로 의지하였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것들이 쌓이고, 넘치고, 얻어지자 그것들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명철(understanding)’의 삶이 아니라, 높아진 태도(overstanding?)’를 가지게 하였고, 그렇게 교만한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 1~12절 전체에 흐르는 영적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가려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내 뱃속의 깊은 곳’이 드러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살리시려고 부르십니다. 영혼 깊은 곳의 어둠을 밝힘으로 수술하시려고 부르시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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