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1장 18~31절
1. 오늘 본문은 세상이 말하는 진리와 전혀 다른 ‘십자가의 역설적 진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한정된 분량으로 다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특히, 저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성령을 의지하며,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을 몇 번 읽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 먼저, 17절과 18절은 단절된 단락이 아닙니다. 연결된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18절 앞에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18절 이하는 17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18절의 “십자가의 도(道)”에서 “도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입니다. ‘말, 말씀, 진리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도(진리)’는 ‘말, 글, 학문, 지식 등’으로 전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가 못 박힌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못 박혀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못 박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멸망하는 자들” 즉, 십자가에 못 박힘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죽기 위해 붙드는 십자가는 미련한 정도가 아니라, 미친 짓입니다.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진리의 역설’을 설명합니다.(19~27절)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나의 패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20절, 26절 등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처럼 못 배우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주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을 ‘막무가내 전도’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전도”는 ‘케뤼그마(kerugma)’입니다. 직역하면 ‘선포(proclamation)’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케뤼그마(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의 과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삶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아실현’을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닌지 늘 두려움으로 자신의 내면을 십자가 앞에 내놓게 됩니다. 이런 ‘자기 점검’없이 없다면, 그 어떤 전도를 위한 헌신적 삶도 ‘종교활동’일 뿐입니다. (물론, 전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제가 말씀드린 것을 붙들고 빠져나가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3. 사실, 오늘 본문은 “멸망하는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17절과 18절이 연결되었기에, ‘분파’를 이루고, 이런저런 문제들 속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죽는 것’을 택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29절 이하를 가슴에 새깁니다. 특히, 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예레미야 9장 23~24 인용)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과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여호와의 사랑, 정의, 공의’는 ‘대속의 은혜’로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대신 제물 드림으로 이루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공의, 정의’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겸손과 축복으로 포장된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랑이 뭔지 모릅니다. 자랑을 하려 다가 멈춥니다. 자랑해버렸다면 너무 부끄러워합니다. 자신의 옳음, 주장,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보다 귀한 것이 없어, 나를 십자가에서 못 박음이 가장 큰 기쁨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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