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1. 오늘 본문부터 ‘고린도전서’의 본격적이 내용이 시작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훈계하며, 대안을 제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시작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일에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와 비슷한 시기와 배경(사도행전 17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머물면서 개척한 ‘고린도 교회’는 정말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가정교회’ 혹은 ‘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속에 이런 저런 경쟁과 비교로 인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면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냉정함을 가지고 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상적인 교회도 완벽한 교회도 아닙니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고린도교회’는 교회 내의 분열, 음행과 다툼, 잘못된 결혼관, 우상에 바쳐진 제물 문제, 예배 문제, 부활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 그 문제는 점점 더 불거졌습니다. 결국 바다(에게해) 건너 ‘에베소’에 머물던 사도 바울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고, 그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2. 오늘 본문 12~17절은 사람 중심으로 갈라져 분란이 일어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12절을 보면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심지어 ‘그리스도파’까지 등장합니다.
13절에는 이런 분열의 상황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 속상함, 애통한 심정이 잘 나타납니다. 원어를 보면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세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못박혔으며’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제발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람 바울’이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하나 됨, 그 속에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14~16절을 보시면, 오히려 세례를 단 몇 사람에게 라도 베푼(집례한)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흔히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학연, 지연, 혈연 등을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죄악시합니다. 그런데, 교회, 교단, 교계 내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요즘은 ‘교파, 교단’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유명 목회자가 만든 ‘훈련프로그램, 세미나 등’으로도 나뉩니다. (물론, ‘복음 전파’를 위해, ‘신학 정체성, 교회 연합, 영적 네트웤(network) 등’ 이런 저런 ‘거룩한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그냥 ‘핑계’입니다.)
게다가 각 개인들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공동체’ 내의 이런저런 ‘부서, 목장, 구역, 전도회, 위원회, 훈련팀, 수료기수 등’으로 나뉩니다. 심지어 ‘어느 목회자에게 세례 혹은 훈련 받았는지, 임직 받았는지’등으로 나뉩니다. 그걸로 ‘영적 자부심’마저 느낍니다. 이런 종류는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저렇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 뭔가를 기를 쓰고 만들려는 이유가 뭘 까요? (오해는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17절에 있습니다.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너무 원론적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17절의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으로 내가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사람의 모임을 통해 ‘자아 충족’을 느끼는 내가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 자아가 좋아하고 끌리는 이런 저런 ‘사람의 분파’에 속함으로 뭔가 ‘든든함, 푸근함, 뿌듯함’을 느끼려는 사람의 생각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와 교회 섬김을 위해 이런저런 그리스도인(사람)이 모인 모임(공동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일할 사람을 선출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악함, 죄성, 연약함’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힘을 택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 베풂’이라는 가장 귀한 영적인 행위 조차도 ‘오직 복음 전함’ 즉, ‘말의 지혜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는 복음’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은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힘’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흘러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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