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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22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상 29장 1~11절



1. 본문의 시선은 다시 ‘다윗’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내용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함께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전쟁에 나갑니다.

다윗이 반역자가 된 것일까요? 반역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상 27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다윗을 보호해준 것이 ‘가드(블레셋) 왕’ ‘아기스’였습니다. ‘아기스’의 호의를 입은 ‘다윗’은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살았습니다.

그 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로 향하는 길목인 ‘아벡’에 블레셋의 군대가 집결한 것입니다(1절).

이 전쟁으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자기 길을 간 사울’과 ‘하나님의 길을 간 다윗’에 대하여 성경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자기 길’을 가면서도 ‘왕의 껍데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간다고 ‘착각한 사울’과 ‘하나님의 길’을 가면서도 ‘갖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가는지 ‘모르는 다윗’입니다.


2. 물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에게 조차 신뢰를 얻는 다윗’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3~5절에 기록된 ‘블레셋 방백들(지도자들)의 의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돌려보내는 ‘아기스’의 모습과 그의 말(6~7절)을 들으면 감동 그 자체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의 평가가 진짜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 우리 생업과 사업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생명이 우리를 통해 전해져야 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는 죽고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삶의 열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특징입니다.


3. 오늘 본문 속에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다윗의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좀 복잡합니다. 여기서 “내 주 왕”은 ‘아기스’입니다. “내 주 왕의 원수”는 ‘이스라엘과 사울’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지혜입니까? ‘아기스’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다윗의 연극인가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다윗의 속마음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8절을 보면서 무턱대고 ‘지혜로운 다윗’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칫하면 다윗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제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할 뿐입니다. 사무엘상 29장의 상황과 30장을 연결해서 살펴보며 묵상한 것입니다.

29장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묻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싸워야하는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냥 ‘아기스’를 따라 나갑니다. 지금은 ‘아기스’의 말을 들어야 사는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그것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30장 8절에서는 물었습니다. 당연한 것조차 물었습니다. 아말렉을 쫓아가서 아내들과 백성들을 구하는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 물었습니다.


4. 묻지 않은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또 다른 당연함’이 아니었을까요? 그 해답은 사무엘상 26장 10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戰場, battel field)에 나가서 망하리라”고 말합니다.

네, 다윗은 사울을 두 번 살려줍니다. 이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두 번씩이나! 살려줬습니다.’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저렇게 하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다시 만난 곳이 어디입니까? 네, ‘전쟁터’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일, 그 기억을 붙잡고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결국 사울을 전쟁터에서 만났구나. 오늘이 내가 왕이 되는 날이구나. 이 전쟁터에서 내가 사울을 죽이지 않아도 오늘 사울이 죽고, 내가 왕이 되는구나. 결정적인 순간 나는 칼끝을 돌려 블레셋을 치면 되는구나”라는 식의 자기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이럴 수록 더 물어야 합니다. 더 엎드려 물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했어야 합니다. 정말 ‘사울’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여 칼을 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기도했어야 합니다.


5.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지혜로운 다윗’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다윗’을 끝까지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전쟁터를 벗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이런 곤란한 상황 앞에서 다윗 같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이 모든 것이 잠잠해지길 엎드려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똑똑하여 빠른 것, 참 좋습니다. 멍청한 것보다 낫습니다. 하지만, 나의 명석한 두뇌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에 기다리는 여유가 더 낫지 않을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합니다. “지금 이러고 있는 나를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 보실까…?”라며 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기도합니다.


6. ‘모르는 다윗’이 마침내 알게 된 때는 ‘사무엘하 1장’일 것입니다. 그때서야 자기가 ‘그 전쟁터’를 벗어난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극도의 긴장과 흥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전쟁터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울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은혜입니다.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보다 생각의 고리를 끊기 위해 십자가 앞에 엎드린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은혜인 줄 믿고 ‘내 생각 반대로 되는 것이 기쁨입니다.’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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