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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22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잠언 27장 14~27절


1. 히스기야 왕 때 편집된 솔로몬의 잠언(25장 이후)은 좀 더 현실적인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읽을 때 ‘맞아.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마음의 동의가 일어납니다.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가슴 아픈 안타까움을 붙잡고, 더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에서 그치지 않고 나 대신 예수님께서 사신다는 믿음으로 결단하게 됩니다. 넘어질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오늘 또 말씀대로 살기위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잠언 27장의 후반부인 오늘 본문은 사회적 관계(이웃, 친구 등)와 관련된 말씀(14~18)뿐 아니라,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인간의 미련함에 대한 말씀(19~22절), 양 떼와 소 떼를 잘 돌보는 것을 통해 소유를 절제와 부지런 함으로 잘 관리하는 것에 대한 말씀(23~27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지키고, 실천함으로 현실에서 더 지혜롭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의 인생에 따스함과 풍성함을 줍니다. 꼭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이 매일 매순간 새로움 안에서 나아지길 원하십니다.

2.무엇보다 이 새로움이 새나가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뚫린 밑바닥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십니다.

20절의 기록처럼 ‘스올, 아바돈’이라고 표현되는 ‘궁극의 죽음,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범죄한 인간 영혼’의 상태를 십자가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림으로 영혼의 구멍이 생긴 인간입니다. 그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과 탐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다함이 없는 사랑, 그치지 않는 은혜로 막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세상의 것으로 아무리 채워도 소용없습니다. 22절에 ‘미련함’은 다른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 지식, 센스 등’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은혜와 사랑으로 뚫어져 구멍 난 ‘영혼의 밑바닥’을 메우지 않은 것입니다. ‘영혼의 밑바닥’이 구멍 난 줄 모르고 세상의 매력, 인간 욕망의 매혹이 요구하는 것들로 채우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찧어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절구’ 안에서 ‘십자가의 공이’로 빻는 것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미련이 벗겨져 나갑니다.


3. 이것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21절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칭찬이 사람을 단련한다’는 것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했습니다.

21절의 말씀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제목의 책이 유행할 때 참 많이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사람은 그의 칭찬의 말에”입니다. 히브리어는 함축성이 매우 강합니다. 따라서 앞에 따라오는 내용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은과 금의 순도(상태)를 도가니와 풀무로 알아보는 것처럼, 사람의 어떠함은 그를 향한 말(칭찬)을 통해 알 수 있다.” 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네, ‘잘 된다는 말, 잘한다는 말,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칭찬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칭찬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진실된 칭찬과 부추기는 칭찬입니다. 사실 첫번째 경우는 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그 앞에서 부추기듯 칭찬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칭찬에 목말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러움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합니다. 은근히 자랑하고, 그 은근한 자랑을 먹이 삼아 사람들은 또 부추기듯 칭찬하고 돌아서서 엉뚱한 소리합니다.

4. 솔로몬… 이런 식의 삶에 지쳤을 것입니다. 자신의 대단함을 보고 그 앞에서 칭찬하던 사람들, 그 칭찬에 속아 자기가 뭔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살았던 삶이 너무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열왕기상’을 통해 솔로몬에 대해 다시 살펴볼 때가 기억나십니까? 왕에 즉위한 뒤 솔로몬이 처음지면서 공식적으로 최고의 칭송과 찬사를 들었을 때가 언제였을까요?

네, ‘일천 번제’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 기록된 ‘일천 번제’였을 것입니다. (물론, ‘역대상 5장’에 기록된 ‘성전 낙성식’도 포함됩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양과 소’를 비롯한 짐승들을 잡았겠습니까? 특히, 성전 낙성식 이후에는 ‘화목제’로 드린 고기를 온 백성과 함께 먹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왜, 제가 이것을 강조할까요? 23~27절을 솔로몬의 참회하는 솔로몬의 마음으로 보기 위해서 입니다. (‘아…’라는 마음의 감탄이 흘러나오십니까?)

23절의 ‘양 떼를 살피고, 소 떼에 마음을 두라’는 것은 ‘재산 증식’이 아닙니다. 속제의 제사를 위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 대신 드려질 ‘제물’인 ‘소와 양’, 즉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영혼과 전 인격)을 두라는 말입니다.

24절의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는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면류관이 영원히 있다는 것’을 반어적 표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25절은 ‘십자가 은혜’ 속에 참 생명의 움이 돋아난다는 뜻입니다. 26절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옷 입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밭(마태복음 13장 44~46절)’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26~27절은 ‘대속죄일 규례(레위기 16장 20~22절)’와 연결됩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나의 영혼과 마음이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말, 사람의 부추김,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에 속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의 인도함 따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의 강에 마른 목을 축이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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