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28장 3~25절
1. 오늘 본문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줄을 그었습니다. 마음에도 줄을 그었습니다. 한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사울…’이라는 동정심에서 나온 한숨이 아닙니다. 제 자신을 향한 한숨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여전히 ‘사울’을 보면서 ‘저 사울 같은 어떤 사람’이 떠오르는 한심한 제 모습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곱씹어 가만히 읽어보면 ‘사울’의 모습은 제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런 제 안에 ‘영적 인정’ 아니, ‘영적 굴복(?)’, 십자가 은혜 앞에 높아진 제 마음이 굴복되기까지 많은 기도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제 본성은 ‘내가 사울입니다.’라는 진실된 인정과 고백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사울이라는 인정 없으면, 다윗으로 이끄는 내 은혜를 붙들지 않는다. 너는 그냥 다윗이 받은 축복, 다윗이 사람에게 들은 칭찬이 좋아서 다윗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든 것뿐이다. 그저 다윗이 부러운 것이지, 다윗이 붙든 대속의 은혜, 다윗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이끌림 받은 것이 아니다. 사울같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다윗이 예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신의 계시(?)’로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십자가로 이끄시는, 십자가에 저를 못 박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에 감히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사울’은 이것을 놓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사는 길! 범죄한 나를 인정하고 엎드리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전쟁 승리’라는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이 있으면 자신의 왕위가 조금 더 연장될 것 같았습니다. 알량한 왕의 자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엎드리는 것 보다 더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간 것이 ‘신 접한 여인’입니다(7절). 고상한(?) 표현입니다. 그냥 ‘접신한 무당’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자기 손으로 내쫓은 무당이었습니다(5절).
물론,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둔 ‘사울의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라도 5절의 기록처럼 ‘두려움’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왜 두려웠을까요? 정말 패배가 두려웠을까요? ‘패배’라는 상황 혹은 상태가 두려웠을까요? 아닙니다. 패배 그 자체보다 패배로 인해 돌아올 사람의 평가가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두려움의 근원 속으로 들어가보십시오. 두려움의 속(inner)과 두려움의 겉(outer)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두려움의 속(inner)에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의 속에는 ‘강한 원함(want)’가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시작한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필요(need)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의 상태가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에 불을 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겉(outer)입니다. 시선입니다. 눈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눈입니다. 그 시선과 눈은 사람의 평가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까?”입니다.
3. “왕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어쩌나, 왕으로 누리던 모든 것이 날아가면 어쩌나, 내 아들 ‘요나단’대신 ‘다윗’이 왕이 되면 어쩌나… 그런 나와 우리 집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가를 어떻게 하나…”라며 전전긍긍하던 ‘사울’은 안타깝게도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내 쫓은 무당을…
이 장면에서 밑바닥이 드러난 겁니다. 급박한 상황, 나의 내면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지 못하고 어떻게든 ‘왕의 껍데기’로 가리며 살았던 ‘사울’의 밑바닥이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본성대로 해버립니다. 늘 하던 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나름의 종교행위는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하던 것, 들은 것, 본 것’은 있었습니다. “꿈으로, 우림(대제사장이 판결 혹은 하나님께 물음을 할 때 사용한 흉패, 출애굽기 28장 30절)으로, 선지자에게 물었습니다.” 네, 그냥 점친 겁니다.
대신 겉으로는 갖은 종교적 껍데기를 갖췄습니다. 누가 봐도 여호와께 묻는 것처럼 보였고, 사울 자신도 여호와께 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것은 ‘사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작정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 심지어 작정헌금까지 하며 기도합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판단한 것, 내가 결정한 것이 ‘맞다!’라는 증표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용한 사람’ (‘용하다’라는 오직 한국 사람 정서에만 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이 ‘맞다!’라고 말해주면 더 좋습니다. ‘용한 목사’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제가 오늘도 가장 많이 기도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제 머리를 스치는 그 생각 반대로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결과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생각을 끊게 됩니다. 폭풍처럼 지나가는 생각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4. ‘다른 옷’을 입으면서까지 ‘엔돌의 무당’을 찾아간 사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왕의 옷, 그 껍데기 위에 또 걸친 다른 옷 역시 하나 더 뒤집어쓴 껍데기일 뿐입니다(8절).
또한 ‘무당이 불러 올린 사무엘 유령(ghost)’ 앞에 엎드린 사울의 모습도 그려봅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영(spirit)’이 아닙니다. 사무엘을 가장한 사탄의 영입니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장 14절). 16~19절의 말을 했다고 ‘사무엘’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창조 때부터 있었던 사탄은 과거의 모든 일을 압니다. ‘사무엘상 15장’의 일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하신 말을 다 들었습니다. 들은 것을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17~18절)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의 일(19절)도 점치듯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사무엘’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는 ‘사울의 어리석음’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묻는 것’과 ‘안 묻는 것’은 다른 것 같지만, 같습니다.
안 물어보는 이유는 이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결정된 일에 ‘NO’라는 대답을 듣기 싫어서 묻지 않습니다.
반대로 물어보는 이유는 내가 결정하려는 그 일에 누군가 ‘YES’라는 대답을 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왕이면 많은 사람, 내가 인정(?)하는 사람, 친한 사람이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랍니다.
또 길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울의 실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늘 저의 의로움을 건드립니다. 그럴싸한 이유를 집어넣습니다. “너는 옳아. 너 열심히 하니까. 너 설교도 하고,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결과도 그럭저럭 좋아. 겸손(?)하기도하고… 힘내. 다윗 같은 너를 건드리는 사울이 분명히 있어. 그런데, 내가 널 지킬 거야. 너의 의로운 오른 손을 들어 줄거야.”라며 속삭입니다. 이런 함정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하여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라는 주님의 말씀만 옳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우울증(?) 걸리지 않습니다. 나를 포기한 자에게 임하는 십자가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낱같은 기쁨’이 ‘영원한 기쁨’을 향하는 것이기에 ‘덥썩 잡은 허망한 기쁨’이 아니라, ‘내려놓은 참 기쁨’을 택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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