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15장 16~35절
1. ‘사무엘상 15장’에 흐르는 기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사무엘 선지자와 승리에 맘껏 취한 사울 왕 사이의 영적 간격은 너무 큽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무엘, 그 메시지를 듣고도 끝까지 핑계대는 사울, 자기도 모르게 본심(30절)을 드러내는 사울, 결국 결별한 두 사람, 그리고 사무엘의 아픈 마음(35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 ‘사무엘상 15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곁에 두고 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사울’일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난 아니다. 난 다르다. 난 특별해.’라는 식의 자기 확신이 우리에게 기본 탑재되어 있습니다. 죄성이죠. 자아에 기울어진 죄악된 본성입니다.
사울 왕은 특별한 악인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의 대명사가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범죄한 본성 그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왕이라는 껍데기만 뒤집어썼을 뿐 ‘여전히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라는 두려움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왕이라는 그의 신분(사실, 신분이 아닙니다. 그냥 직업입니다.)이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2. ‘사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사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좀 다르게 질문하면… ‘사울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꼼꼼하게 읽으셨다면 아실 겁니다.)
그 답은 23절에 있습니다. ‘우상 하나님(idols God)’이 필요했습니다. 사울은 그냥 잘 되게 해주는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울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22~23절의 기록처럼 그의 마음 속을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대속의 은혜를 통한 속죄, 자기 죄의 속죄가 핵심인 ‘번제’를 무당 굿판 수준으로 이용하려는 사울의 간사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우리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제사 드리려고 그랬다.(15, 21절)’는 사울의 핑계는 나의 핑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론 모르고 그런 핑계를 댑니다. 또 알면서도 그런 핑계를 붙듭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길갈’이라는 종교 성지에서 드리는 종교 행사(번제 등)는 꼭 필요했습니다.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와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종교행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야 “내가 모든 가나안의 통치자, 새로운 왕정시대를 여는 초대왕이다”라는 것이 선포됩니다. 백성들(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히게 됩니다. “다만 백성이…(21절)”라는 또 다른 핑계가 완성이 됩니다.
3. 사울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린 죄인인 나에게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은 필요 없었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그런 하나님의 은혜는 한번이면 족합니다.
그 이후로 필요한 하나님은 ‘나를 왕 만들어 주는 하나님’입니다. 길갈에서 내가 드린 멋진 제사, 그럴듯한 종교행사를 받아주는 ‘우상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 증거는 30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30절)”라고 말합니다.
그의 삶의 전반을 이끄는 행동과 선택, 판단 등의 이유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나’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지배당하며 ‘사람에게 좋은 소리 들으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4. 하나님을 이용해 ‘나를 높이고, 자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입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순종’입니까? 말 잘 듣는 것이 ‘순종’입니까? ‘순종’하면 각종 제사는 필요 없다는 것이 22절 속에 담긴 의미일까요?
‘순종’하는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각종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마음 깊은 곳의 동기(motivation), 그 출발점이 중요합니다.
순종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죄악된 본성과 그 판단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경향성에 기울어진 나는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붙들리지 않으면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영혼의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성령의 전적인 역사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첫 시작, 영혼의 동기(Spiritual motivation)가 순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24~25절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네, 저런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가장 종교적인 말입니다. 학습된 거창한 종교 서술입니다.
5. 지금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종교 성지인 ‘길갈’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히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기럇여아림(사무엘상 7장 2절)’, 하나님의 궤가 있는 ‘기럇여아림’으로 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다윗의 훌륭함(?)을 이런 것에서 찾습니다. 왕으로 등극한 뒤 ‘길갈’에서 성대한 종교행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기럇여아림’으로 첫 발걸음을 옮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믿습니다.
어제 못 박힌 십자가에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어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딛은 오늘의 발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진정한 순종의 삶,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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