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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18일 2020년 목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1. 오늘 본문은 성만찬에 관한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으로 ‘고린도교회’에서 ‘성만찬’이라는 교회의 예식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행하신 ‘성만찬’을 제자들이 첫 기독교 공동체로 모인 시점(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기다리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은 말 그대로 ‘식사’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예배와 식사를 함께하는 가족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렇게 다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신령한 음식, 신령한 음료(고전10:3~4)’이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나에게 생명주시기 위해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마음에 새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17절에 사도 바울이 안타까움으로 말하듯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예배, 성만찬 등)은 유익은 커녕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 속에 담긴 십자가를 통한 ‘생명주심’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형식화 된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과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회복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18~19절에서 ‘파당(3장의 파벌문제)으로 인해 분쟁’이 생긴 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19절에 담긴 의미는 ‘파당이 생김으로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자들이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21~22절은 만찬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먼저 먹고, 어떤 이는 과식하며, 어떤 이는 빈약한 식사’를 했습니다.

서로를 배려함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것이 계급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먹는 일 자체만 남아버렸습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장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3~26절에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찢기신 몸, 흘리신 피를 붙들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얻은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게 합니다.

27~32절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자기 돌아봄(28절)’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의 참 의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3~34절에서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모임이 어떠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3.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은 그저 성찬식 때 읽어주는 본문 정도에서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아파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 성찬, 세례 등등 이른바 교회 내의 ‘종교예식, 행사 등’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이런 두려움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이런 영적 질문과 떨림이 없는 것이 이미 ‘해로운 종교행위’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저는 34절을 보면서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뭘 먹으러 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를 위해 먹을 수 있습니다. 대신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먹는 것에 치우치면 먹는 사람도, 먹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도 결국 껍데기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를 보면서 교회는 ‘자아실현’을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님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취하려는 것은 무속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직분’입니다. (제 속에 참 많은 ‘스스로의 물음’이 있지만, 다 쓸 수 가 없습니다.)

‘성만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참목적을 항상 되물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스템 따위를 도입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돌아가라’는 말은 구호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며, 죄성의 본질, 육신의 한계로 내 속에 덕지덕지 붙은 것들을 도려내고, 끊어내고, 잘라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은혜에 푹 빠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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