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하 25장 1~22절
1. 오늘 본문에는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등장합니다. 부부였던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성향을 보입니다. 두 사람의 인생의 끝자락도 다릅니다. 엎드릴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인간 다윗, 왕 다윗’ 앞에 엎드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왕이 될 재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었다가 낭패를 당한 ‘나발’을 닮지 말라는 단편적인 적용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발’은 불량배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아닙니다. 3절의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와 25절의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라 때문에 ‘나발’을 악하고 미련한 사람의 대명사로 몰아세우면 안 됩니다.
본문을 읽으며 “누가 누가 ‘나발’같은가?”라며 생각의 안테나를 올리면 안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나는 ‘아비가일’같다.”라는 자기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나발’의 겉모습은 멀쩡합니다. 배울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나발은 멀쩡해서 뻣뻣했던 사람입니다. 멀쩡한 겉모습 때문에 내면의 엎드림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2. 성경이 말씀하는 ‘완고함, 악함’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 되 먹은, 교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성격 혹은 성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나에게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에게 베풀어진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여전히 뻣뻣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고집스럽고, 악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봅니다. 본성이 나긋나긋하고, 도덕심이 상당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성품이 훌륭해도 십자가 은혜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내 자아의 훌륭함 마저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일 뿐입니다.
제가 지금, ‘나발’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다윗이 베푼 호의와 친절’을 무시하고, 오히려 ‘악’으로 되갚는 ‘나발’은 양심, 도덕, 윤리 조차도 없는 나쁜 사람이 맞습니다.
3. 그러나, 우리는 더 민감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숨은 ‘나발’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발’은 멀쩡하게 유대교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이 아닙니다. ‘나발’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유대교인)입니다.
게다가 그의 종교적, 혈통적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3절의 “갈렙 족속”에 주목해봅시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네, 그 옛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른 지도자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유명한 말을 했던, 그렇게 ‘헤브론’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14장)
‘다윗’과 그의 아버지, ‘이새’의 집안은 비빌 수도 없는 유다 지파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다윗이 도망 다닌 ‘유대 광야와 산악’은 대부분 ‘갈렙 족속’의 소유였습니다.
‘나발’의 입장에서 도망 다니는 ‘다윗’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나의 구역(?)에 숨어든 쥐처럼 보였을까요? 나의 땅에 사울의 군대를 끌어 들이는 귀찮은 존재로 보였을까요?
또는 내가 풍요와 안락을 즐기려는 순간, ‘양 털을 깎는 그때(일종의 잔치와 축제의 기간)’ 껴들어 나를 짜증스럽게 만드는 존재로 보였을까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폭발한 것입니다. 은혜를 망각한 ‘나발’의 삶 속에 끼어든(?) ‘다윗’, 그렇게 ‘다윗’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양 털을 깎는 그때’ 날아든 ‘다윗의 요청’이 ‘나발’의 짜증(?)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4. 잘못된 것을 보며 올라오는 ‘분노(엄격하게는 우리는 분노할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와 ‘짜증’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짜증’과 옳지 못함에 대한 ‘합당한(?) 분노’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물론, 아무리 옳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라도 터뜨리는 것은 안 됩니다. ‘터뜨리는 것’은 인간의 죄성에서 출발합니다. 잘못에 대해 말할 때 만약, 감정을 터뜨렸다면 반드시 사과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향해 자기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10~11절에 드러난 ‘나발’의 태도를 보십시오.
저 말을 소리지르며 했을까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비꼬는 마음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가일’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15~16절의 말을 듣고, 18~31절의 결단과 고백을 하는 ‘아비가일’이 있어서 안심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베풀어진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대단히 멋진, 훌륭한, 영광스러운 사역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나에게 베풀어진 십자가 은혜’를 잊지 않는 영혼의 엎드림을 가진 삶을 원하십니다.
“내 영혼에 유일한 목마름은 십자가 은혜를 향한 목마름 뿐입니다. 주 예수여, 충만한 은혜를 바짝 엎드린 내 영혼에 부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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